서재에 살다 -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덕무가 지은 <간서치전>의 내용이다.

 

-목멱산 아래 어떤 바보가 살았다. 말을 잘하지 못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성품이 게으르고 졸렬하여 세상일을 알지 못했으며,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을 해도 따지지 않았고, 칭찬을 하여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책을 보는 것만 즐거워하여 추운 줄도 더운 줄도 배가 고픈 줄도 몸이 아픈 줄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손에서 하루라도 책을 놓은 날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쪽, 남쪽, 서쪽에 창문이 있어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 해가 가는 방향을 따라 밝은 곳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기만 하면 기뻐서 웃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그가 진기한 책을 구한 줄 알았다. 두보의 오언율시를 아주 좋아하여 아픈 사람처럼 끙끙대며 읊조리다가 심오한 뜻을 깨달으면 매우 기뻐하며 일어나 왔다갔다하였다.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우는 것 같았는데, 어떤 때는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잠꼬대하는 것처럼 웅얼거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런 그를 보고 간서치라 놀렸지만 기쁘게 받아들였다.-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은 물이다 - 어느 뜻깊은 행사에서 전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재희 옮김 / 나무생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59

 

*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받은 인문학 교육의 진가라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성인으로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 또한 자기 머리의 노예, 허구한 날 독불장군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태생적 디폴트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66

 

* 교통마비와 붐비는 상점통로, 계산대 앞의 기나긴 줄 덕분에, 나는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을 보러 갈 때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나의 태생적인 디폴트세팅은 이런 상황 속에서 오로지 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 내가 고단하다는 사실, 내가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84

 

* 나 자신이 바로 이 세상의 중심이며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진 욕구와 감정만이 세상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믿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드가 작동하고 있을 때, 나는 일상의 권태롭고 불만족스럽고 다사다난한 부분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91

 

* 만일 돈이나 물질을 믿는다면-그것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구축한다면-더는 필요 없다는 충족감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111

 

*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12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윌트 휘트먼 19세기 미국명시 7
월트 휘트먼 지음, 김천봉 옮김 / 이담북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Song of Myself

 

1.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

And what I assume you shall assume,

For every atom belonging to me

as good belongs to you.

 

I loafe and invite my soul,

I lean and loafe at my ease

observing a spear of summer grass.

 

My tongue, every atom of my blood,

form'd from this soil, this air,

Born here of parents born here

from parents the same,

and their parents the same,

:

:

나는 나 자신을 찬미하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

내가 취하는 모습을 당신도 취하리라,

내 몸을 이루는 낱낱의 원자가

당신의 몸도 이루리니.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구부정히 빈둥거리며 편안하게

여름풀의 창날을 관찰한다.

 

나의 혀, 내 피의 모든 원자가

이 땅, 이 대기에서 형성되었고,

이곳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들의 부모도 그랬고,

그들의 부모도 그러하였다,

 

 

6.

A child said Whit is the grass?

fetching it to me with full hands;

How could I answer the child?

I do not know what it is any more than he.

 

I guess it must be the flag of my disposition,

out of hopeful green stuff woven.

 

Or I guess it is the handkerchief of the Lord,

A scented gift and remembrancer designedly dropt,

Bearing the owner's name someway in the corners,

that we may see and remark,

and say Whose?

 

Or I guess the grass is itself a child,

the produced babe of the vegetation.

 

Or I guess it is a uniform hieroglyphic,

And it means, Sprouting alike in broad zones

and narrow zones,

Growing among black folks as among white,

Kanuck, Tuckahoe, Congressman, Cuff,

I give them the same,

I receive them the same.

:

:

한 아이가 물었다 풀이 뭐예요?

두 손 가득 풀을 쥐고 내게 가져와서는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대답하랴?

아이와 똑같이 나도 그게 뭔지 잘 모른다.

 

필시 내 기질의 깃발이리라,

희망찬 녹색 물질로 엮어 만든 깃발

 

아니 어쩌면 주님의 손수건이리라,

고의로 떨어뜨린 향긋한 선물 혹은 기념품,

모퉁이 어딘가에 주인의 이름이 찍혀있어,

보면 누구나 금세 알아보고,

누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손수건?

 

아니면 풀 그 자체가 한 아이이리라,

그 식물이 낳은 아기.

아니면 일정불변의 어떤 상형문자이리라,

그래서 넓은 지대든 좁은 지대든

똑같이 싹을 틔우고,

백인들 사이에서도 흑인들 사이에서도 자라나,

캐나다사람, 버지니아사람, 국회의원, 수갑 찬 죄수,

그들과 내가 똑같이 서로

주고받는 문자를 뜻하리라.

 

 

To a Stranger

 

Passing stranger! you do not know

how longingly I look upon you,

You must be he I was seeking,

or she I was seeking,

(it comes to me as of a dream,)

I hove somewhere surely lived a life

of joy with you

All is recall'd as we flit by each other,

fluid, affectionate, chaste, matured,

You grew up with me, were a boy with me

or a girl with me,

I ate with you and slept with you,

your body has become not yours only

nor left my bo요 mine only

You give me the pleasure of your eyes,

face, flesh, as we pass,

you take of my beard, breast, hands,

in return,

I am not to speak to you,

I am to think of you

when I sit alone

or wake at night alone,

I am to wait, I do not doubt

I am to meet you again,

I am to see to it that I do not lose you.

 

 

지나가는 낯선 사람아! 당신은 모른다

얼마나 간절히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지,

당신은 분명 내가 찾고 있던 그이리라,

혹은 내가 찾고 있던 그녀이리라,

(꿈길에서인 양 내게 다가오나니,)

나는 필시 어디선가 당신과 함께

흥겨운 삶을 살았으리라,

우리가 서로 휙 스쳐가는 순간 모두 생각난다,

유려하고 다정하고 정숙하고 성숙한

당신은 나와 함께 자랐다, 나랑 같이 자란 소년

혹은 나랑 같이 자란 소녀였다,

나는 당신과 함께 식사하고 당신과 함께 잤다,

당신 몸은 당신의 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내 몸에 나의 몸으로도 남아있었다,

우리가 지나칠 때,

당신은 내게 당신의 두 눈,

얼굴, 살의 기쁨을 선사하고,

그 보답으로,

당신은 나의 수염, 가슴, 두 손을 받는다,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건네지는 않으리라,

나 홀로 앉아있을 때

혹은 밤에 홀로 깨어있을 때,

나는 당신에 대해 생각하리라,

나는 기다리리라, 의심의 여지없이 꼭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리라,

나는 절대로 당신을 잃지 않으리라.

 

 

O Me! O Life!

 

O me! O life! of the questions of these recurring,

Of the endless trains of the faithless,

of cities fill'd with the foolish, of myself forever reproaching myself,

(for who more foolish than I, and who more faithless?)

Of eyes that vainly crave the light,

of the objects mean,

of the struggle ever renew'd

Of the poor results of all,

of the plodding and sordid crowds

I see around me,

Of the empty and useless years of the rest,

with the rest me intertwined,

The question, O me! so sad, recurring-

What good amid these,

O me, O life?

Ansuwer,

That you are here-

that life exists and identity,

That the powerful play goes on,

and you may contribute a verse.

 

 

오 나여! 오 삶이여! 이 되풀이되는 질문들,

믿음 없는 이들의 끝없는 행렬,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한 도시들,

나 자신을 영구히 비난하는 나 자신,

(누가 나보다 어리석으랴, 또 누가 더 믿음 없으랴?)

헛되이 빛을 갈망하는 눈길들,

하잘 걸 없는 목표들,

늘 새롭게 시작되는 투쟁,

만사의 초라한 결과들,

나의 주변에서

지척거리는 지저분한 군중들,

나머지 사람들의 공허하고 쓸모없는 세월,

그 나머지와 내가 서로 뒤얽혀,

너무 슬피, 되풀이되는 문제, 오 나여! -

이런 와중에 무슨 소용이랴,

오 나여, 오 삶이여?

해답은

바로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

삶이 존재하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 강력한 연극이 계속되는 한,

너는 시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로이처 소나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영범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방탕은 사실 육체적인 것에 있는 게 아닙니다. 육체적 방탕은 추악한 일도 아니고 진정한 방탕도 아닙니다. 진정한 방탕이란 바로 육체 관계를 갖고 있는 여자에 대해 도덕적으로 자신을 해방시켜 버리는 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해방을 제가 취해야 할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절 사랑했기 때문에 몸을 허락했던 여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여자에게 돈을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여자와 아무런 도덕적 관련이 없다고 여긴다는 걸 보여준 후에서야 마음이 편안해진 겁니다. 26-7

 

 

* 이상한 일은, 아름다움이 곧 선이라는 완전한 착각이 자주 일어난다는 겁니다. 예쁜 여자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해도 사람들은 그걸 알아듣지도 못하고 똑똑하다고 합니다. 예쁜 여자가 추악한 말과 행동을 해도 사람들은 그걸 애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바보 같은 소릴 하지도 않고 추악한 짓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정말 똑똑하고 도덕적이며 멋지다고 확신합니다. 38-9

 

 

* “선생님은 우리 계급의 여자들이 창녀촌의 여자들과는 다른 욕구에 따라 산다고 하시지만, 저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증명하겠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삶의 목표 그리고 삶의 내적인 내용에 따라 서로 다르다면, 이 차이가 외양에 확실히 반영될 거고 그럼 외양도 다를 겁니다. 하지만 불행하고 멸시당하는 여자들과 가장 고상한 상류사회의 귀족 처녀들을 관찰해 보세요. 옷차림이나 모자 모양도 똑같고, 향수도 똑같습니다. 팔이나 어깨, 젖가슴을 노출하는 것도 똑같고, 허리를 눈에 확 띄도록 팽팽히 조이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또한 고가의 반짝이는 물건, 즉 보석에 대한 강렬한 욕망도 똑같고, 이들이 즐기는 유흥이나 춤과 음악 그리고 노래도 똑같습니다. 그 불행한 여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하는 데 열중하는 것처럼, 이 귀족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란게 전혀 없습니다. 잘라 말하면, 단기간 이용되는 창녀들은 통상적으로 경멸을 당하지만, 장기간 이용되는 창녀들은 존경받습니다. 44

 

 

* “아이고!.....이 소나타는 무서운 작품입니다. 아니, 보편적으로 음악이란 무서운 겁니다. 그게 뭘까요?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음악이란 게 뭘까요? 그게 뭘 하는 걸까요? 아니, 뭣 때문에 음악이 그런 겁니까? 사람들은 음악이 영혼을 고양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음악은 끔찍한 영향을 미칩니다. 저 자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음악은 영혼을 전혀 고양하지 못합니다. 음악은 영혼을 전혀 고양하지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흥분시키거나 자극합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음악은 저 자신을 망각하게 하고, 저의 진정한 위치를 망각하게 하며, 저를 제 위치가 아닌 어떤 다른 위치로 옮깁니다. 음악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 제가 느끼지 못하는 걸 느끼는 것 같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이해하는 것 같고,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에는 하품이나 웃음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말로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졸리지 않아도 하품하는 사람을 보면 따라서 하품을 하게 됩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음소리를 들으면 따라서 웃게 됩니다.

음악은 저의 정신 상태를 작곡가가 가졌던 정신 상태로 즉시 본능적으로 옮기더군요. 저는 정신에 의해 작곡가와 하나로 결합되면서 작곡가와 함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옮겨 다니지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크로이처 소나타>를 작곡한 사람은 베토벤이 아닙니까? 그는 자신이 왜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상태가 의미 있었지만,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처럼 음악은 오로지 자극할 뿐이지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호전적인 행진곡이 연주되면 군인들이 지나갈 겁니다. 음악이 감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춤곡을 연주하면 저는 춤을 춥니다. 음악이 감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EH한 미사곡을 연주하면 저는 성찬을 받습니다. 역시 음악이 감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극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극 속에는 뭘 해야만 한다는 게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음악은 아주 무섭고, 가끔 아주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음악을 국가가 관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되는 겁니다. 원한다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최면을 걸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옳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오디세이아>, <신곡>, <모비딕>을 읽었다면,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이 빛날 것이다. 한 권도 읽지 못했다면 이 책에서 빛나는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호메로스에게 있어 신들이 조율하는 자라면, 인간 위대성의 정수는 신들이 맞춰놓은 정조에 자신이 조율되도록 놔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정조는 솟구쳐서 잠시동안 누군가를 사로잡다가는 이내 그를 떠난다. 그리스인들은 정조의 이런 일과적인 특성을 퓌시스physis(자연, 생기, 출현)라 불렀다. 이처럼 정조가 일시적이라는 생각은 호메로스의 다신주의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들이 만신전을 형성한다는 점일 것이다. 신들은 저마다 특정한 정조를 비춰주며, 그 정조를 지키려는 의식들 일체를 뒷받침해준다. 신들은 저마다 자기 영역에서 가장 탁월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빛나는 사례들이다. 최고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세계를 규정하는 이들 정조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해 온몸을 열어 잠시 동안 휩싸이거나 붙들리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단일한 신이 아니라 신들의 만신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통일하는 밑바탕의 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아프로디테가 에로틱한 영역에서 갖는 탁월성과 가정의 수호신 헤라가 갖는 탁월성은 서로 어울릴 수가 없다.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정조에 얼마만큼 열려 있는가를 통해 인간의 탁월성을 이해했고, 또한 그 정조가 일시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실존에서는 다양한 신들이 제각기 비추고 있는 의미들을 서로 화해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처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신들의 다신주의적 복수성을 이해한다면 헬레네의 능력도 이해가 된다. 즉 메넬라오스와 함께 가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다가 파리스와의 에로틱한 삶으로 거침없이 옮겨가는 능력 말이다. 헬레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런 이해들을 화해시키거나 그것들에 순위를 매길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냥 각각의 상황에 휩쓸리도록 자신을 열어두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호메로스가 그녀를 “여인들 가운데 빛나는” 존재라고 한 것이다. 149-51

 

 

* 아이스킬로스에게 제우스는 더 이상 만신전을 관장하는 인격화된 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가 <오레스테이아>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과 새로운 올림포스 신들처럼 어떤 문화적 추동력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대신에 제우스는 이런 모든 힘들을 가능케하는 근거,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행위들의 근거가 된다. 그는 모든 것에 깔려있는 배경으로서, 딱히 무엇이라고 묘사할 수는 없어도 모든 유의미한 사건들의 근저에 놓인 무엇이다. 예를 들면, 코러스는 “제우스, 그가 무엇이든” 이라고 언급하기도 하고, “제우스가 한 일이 아니라면 죽을 자들 가운데서 행한 것이므로”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제우스는 감춰진 배경으로서 그 자체로는 재현 불가능하지만, 문화의 모든 의미심장한 관례들과 실천들을 지탱해주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성스러움에 관한 매우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생각으로서, 특히 유대-기독교적인 신 관념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179-80

 

 

* 신전, 대성당, 서사시, 연극, 그리고 기타 예술작품들은 그 문화에서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만을 떠받들고 주목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부모가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무엇을 재현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전이 “아무것도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작동work한다. 즉 예술작품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주목시켜주는 일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모름지기 빛을 발하는 예술작품은 그런 삶의 방식을 비추고 주목하게 해주며, 자신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빛나게 한다. 예술작품은 그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184

 

 

* 이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저자가 플라톤에 대한 뛰어난 비판자였음이 드러난다. 플라톤과 달리 그는 영원하고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닌 나무나 탁자와 같은 물질적 사물들이야말로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것과 달리, 몸을 가진 존재는 절대로 허약하거나 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몸은 오히려 힘을 지닌 것이고, 몸을 가진 개체는 몸이 없는 영혼보다 더 안전한다.

기독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들이 원하던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통해 기독교를 명료화하고자 애썼다. 이런 해설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떠맏았는데, 이 책은 실재에 관한 그리스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를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화해시키려 한 작품이었다. 이런 아퀴나스 신학을 대중화한 사람이 바로 아퀴나스보다 한 세기 뒤에 살았던 단테 알리기에리였다. 216

 

 

* 음유시인들 덕분에 단테는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 한 여인에 대한 t k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단테는 제1운동자의 궤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하지만 신의 관조를 통해 얻은 축복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의 모든 개인적 의지, 즉 베에트리체에 대한 사랑이나 정치에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없애버린다. 확실히 단테는 축복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축복이 우리들 개인을 지우면 지울수록 우리는 더욱 강렬한 기쁨에 젖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토록 행복한 축복과 견주어볼 때 우리가 지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은 하찮은 것이 된다. 단테는 이것을 “온갖 달콤함을 능가하는 기쁨”이라고 표현한다. 단테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모든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이 사랑 속에 흡수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일까? 그것은 실존의 충만함에 이르는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회피하는 길처럼 보인다. 사살상 이것은 중세적 형태의 허무주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 앞에서는 베아트리체의 사랑도, 단테의 정치적 열정도 모두 사소한 것이 되고, 이런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237

 

 

* 에이해브는 로마 기독교 세계를 몰락시키는 악마적 사악함과 자신을 나란히 세움으로써 악마의 육화를 완성한다. 그러나 멜빌은 이 구절을 완성할 의향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호손에게 그것을 스스로 완성하라고 말한다. 추측건대 이것은 책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표면적 진리들에 대해 스스로를 닫는 내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종교라면 무엇이건 멜빌은 “(그 종교의)~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모든 다신적 진리들을 당신 스스로 발견하도록 놓아둔다. 그런 진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맛보도록 하자. 325-6

 

 

* 다 자란 성인이 나무 막대기를 들고 딱딱한 공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이나, 덩치 큰 젊은이들이 선 너머로 타원형 구체를 던지거나 들고 뛰는 광경을 보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스포츠가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에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한다. 경기하는 순간이나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 순간이 오면 뭔가 압도적인 것이 우리 앞에 일어나 손으로 만질 수 잇을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며, 거센 파도처럼 우리를 덮어버린다. 이런 순간이 오면 사건과의 물리적 거리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성스러움으로 빛나는 순간이다. 335

 

 

* 무슨 이런 하품 나는 고민을 야구 경기장에서 한다는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칸트의 경고 속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결국 야구장에서 관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과, 히틀러의 집회에서 군중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 사이에는 포착하기가 매우 힘든 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루 게릭의 고별사를 위대한 스포츠 연설이 아니라 하나의 수사학적 웅변으로 본다면, 그 거리는 더욱 좁혀질 것이다. 현상의 반짝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루 게릭의 고별사와 히틀러의 선동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지적할 수 없다면, 아마도 칸트가 말한 성숙함이야말로 지루하기는 해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가장 현명한 지침이 될 것이다. 350

 

 

* 서양의 숨겨진 역사는 우리에게 한 가지 형태의 성스러움만이 아니라 상이하고도 양립 불가능한 성스러움의 형태들을 여럿 남겨 놓았다. 퓌시스는 우리를 파도처럼 고양시키는 거칠고 열광적인 성스러움을 보여주었고, 포이에시스(창작)는 사물들을 가장 훌륭하고 성스러운 상태로 만드는 온화한 양육적 스타일을 보여주며, 테크놀로지는 모든 성스러운 것들을 비웃는 삶의 자동적이고 자족적인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메타 포이에시스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373-4

 

 

*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늙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아온 두 제자가 있었다. 어느날 스승이 말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너희들의 인생은 복될 것이다.”

제자들은 아쉬움과 흥분이 뒤섞인 채 스승을 떠나 각자의 길로 갔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다시 만난 것에 행복해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으려는 기대감으로 들떴다.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3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