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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 리어왕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감독 / 에이치디엔터테인먼트 / 2009년 9월
평점 :
1971년 덴마크 북부 저트랜드 겨울에 촬영되었다. 브룩의 킹리어는 불편한 이야기이다. 화를 잘내는 늙은 왕이 바보같은 결정으로 그의 재산을 은혜를 모르는 딸들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서구의 부모들은 어디서나 일상에서 그들의 자녀들과 다툰다. 헤어스타일에서 자잘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리어왕처럼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라고 소리치길 원한다. 이 극은 베케트의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은 대체로 무언극,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뜻이나 목적이 없으므로 인간은 서로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종래의 극형식이나 이론 정연한 대화 따위는 벗어 던지고 논리도 없고 뜻도 없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침묵까지 사용하여 인간 존재의 뜻 없음을 전달한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를 반영하고 , 균열된 우주를 히로시마 폭발 후에 대재난처럼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어두운 시각은 브룩에게 비평가들의 많은 분노를 가져왔다. 그 영화는 “시적이지 않고, 서투르며, 슬픈 타락이며, 재난당한 지역으로부터 밀반입되어 온 과다 노출된 8mm 홈무비처럼 보인다” 등의 평을 받았다. 미국의 영화 비평가 pauline kael은 심지어 dislike가 아니라 hate it (증오)이라고 표현했다. 반면에 몇명은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포커스를 벗어났다는 것을 이해했고 상상력의 훌륭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세익스피어 리어 왕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외골수적인 시각을 지닌 것이다. 리어왕은 심도 깊은 포스트 모더니스트 요소, 최첨단의 예술기법-손에 드는 카메라, 조명과 사운드, 우수한 필름 제작-등으로 제작자가 세익스피어 극을 다시 상상하는것을 자유롭게 했다. 고의적인 아웃포커스(주제를 돋보이도록 배경을 흐릿하게 하는것)는 끊임없이 엄격한 North Jutland의 겨울 풍경을 흑백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고의적으로 정신착란의 전략을 사용하여 헐리우드 영화처럼 매끈한 부분을 없애버린다. 이 영화는 관중들을 불편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장 뤽 고다르(네 멋대로 해라, 점프컷 사용)처럼 -씨네마적 단절을 사용하여 익숙한 형태에서 멀리 벗어났다-브룩은 불연속적성, 줌페이드, 움직임의 가속화,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 충격적인 편집, 복합적인 역 앵글 숏, 오버 더 숄더 샷, 몽타주, 점프 컷, 오버헤드 샷, 조용한 스크린 타이틀, 눈만 클로즈업하기, 헨드 헬드(소형) 카메라 등을 사용한다. 영화에서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사라지고, 단지 스크린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몇가지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지도가 늙은 왕의 헛된 여행을 상징하고 거울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거울은 생략되었고 지도는, 결코 왕이 지도를 가져오라고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딸 거너릴에게 왕궁의 1/3을 줄 때 땅바닥에 펼쳐질 뿐이다. 이 지도는 보풀이 일고 얼룩이 져서 흐릿하며 초라하다 거너닐은 정의와 국왕의 상징인 동그런 구를 위로 높이 들고 그녀의 충성심을 증명한다. 움직임없이 귀에 거슬리는 듯한 목소리로 폴 스코필드가 맡은 회색빛의 리어왕은 느리게 자식들에게 그의 권력 양도의식을 실행한다.
다음으로 뽐내듯이 리건이 신성하게 구를 들고 등장하고 왕국을 상속받기 위해 아첨의 말을 한다. 코델리아는 홀로, 고독하게 뒤에서 남아있고 그녀의 차례를 기다린다. 마침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의 말은 단지 “ Nothing my lord" 이다.
오프닝 씬과 엔딩씬은 침묵으로 이 영화를 시작하고 침묵으로 끝맺는다. 브룩은 음악을 최대한 잘라내었다.
첫 오프닝씬은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비췬다. 이것은 머리에 대한 탐사로, 그들은 꼼짝 않고서, 침묵하며 수수께끼처럼, 무를 응시한다. 오프닝에서 어떤 숏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다가 리어왕이 화가나서 작은 문을 박차고 나갈 때야 비로소 그들이 문밖에 있었음에 알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야 그들이 왕의 100명의 기사들인 것을 알게 된다.
외부 샷은 왕의 영혼적 고뇌를 상징한다. 말은 얼어 붙은 길을 가고, 마차는 풍경속에서 흔들거리며 고집쎈 기사들은 단체로 이동하고, 음산한 지역을 지나간다. 글로세스터 궁 근처의 황야에서 리어, 광대, 에드거는 복잡한 변화를 유발한다. 천둥이 치고, 몰아치는 빗속에서 비를 맞으며 떨고 있는 미친 톰으로 분장한 에드거는 예수를 나타내는 듯하다. 카메라는 무례하게 그의 벗겨진 상체, 배, 사타구니를 낱낱이 보여준다.
용서, 겸허, 동정과 같은 기독교적인 가치들은 부조리주의적 상징들과 조망속에 구현될 뿐, 갱생의 비젼은 사라졌다. 리어왕을 향한 광대의 조롱은 왕이 부정하는 깊은 심연을 뚫고 지나간다. 어떤 등장인물도 광대처럼 기독교의 역설을 잘 나타내주지 않는다. 지혜 속에 어리석음, 어리석음 속에 지혜, 눈멈과 시야, 죽음안에 삶, 삶속의 죽음, 패배속의 승리, 승리속의 패배.
부조리주의극으로써 초월하는 촉매는 베케트의 연극처럼 미쳐버린 리어왕이 눈이 먼 글로우세스터를 응시할 때 나타난다. 크레인숏으로부터 그들은 흐릿한 풍경에서 작게 보여지며 모든것을 빼앗긴 외롭고 힘없는 남자들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원인과 결과, 선과 악, 성경의 욥처럼.
마지막 부분에 공포는 극대화된다. 영화는 점 점 더 어두워지고 야만적으로 되어간다. 리어는 왼쪽, 오른쪽으로 프레임이 옮겨지며 촬영되고 톰의 클로즈업 샷과 롱샷들이 번갈아 나온다. 또한 카메라는 물체들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단순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수가 없다.
리어왕을 습격하여 전쟁으로 얼굴이 더러워지고 지친 거너릴과 리건은 에드먼드를 차지하기 위해 말다툼을 벌인다. 에드가와 에드먼드는 도끼를 들고 싸우고 에드거는 단 한번의 도끼질로 에드먼드를 죽인다. 고너릴은 리건을 땅바닥에 내동뎅이쳐서 죽인다. 그리고 나서 고노릴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드레스를 짓이기며 몸을 흔들다가 스스로 머리를 바위에 부딛쳐 자살해버린다. 이 충격은 단두대 위에서 교수형에 쳐에지는 코딜리아의 짧은 샷으로 이어지는데, 글로스터의 실명과 이에 뒤따를 살해들은 너무도 빨리 진행되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왕은 팔에 코델리아를 품에 안고 불모지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며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울부지는다. 그는 코델리아가 살아있는 것처럼 환각을 일으킨다. 마지막 망상은 미친 노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브룩의 영화는 많은 것을 캐묻지만 대답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황폐한 왕은 점점 냉혹하게 세상 밖으로, 프레임 밖으로 떨어진다. 그가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 카메라는 리어의 얼굴에서 어깨로, 그리고 텅 빈 회색의 하늘로 팬하며 마침내 오직 하얀 빛으로 가득찬 화면만이 남는다. 개인의 파멸 뿐 아니라 자연과 사회도 소외된 채, 자연적인 지속이나 재생의 느낌도 없이 황량한 이미지를 증폭하면서 구제할 수 없는 공허함과 침묵만을 남긴다. The end 라는 형식조차도 없이 이 필름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