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 - [초특가판]
케네스 브래너 감독, 케네스 브래너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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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k Thornton Burnett의 글을 바탕으로 *

 

    브래너는 원작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연극공연 경험을 바탕으로 셰익스피어 영화의 작품성을 중시하는 한편, 관객에게 작품 내용을 쉽고 흥미롭게 전달함으로써 영화의 대중성을 높이는 감독이다.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로 시작한 그는 1989년 『헨리 5세』로 흥행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올리비에의 『헨리 5세』를 넘어선다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가 만든 다음 셰익스피어 영화 『헛소동』은 제작비 8백만 달러를 들여 미국에서만 2천 3백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리면서 셰익스피어야말로 고수익 상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되었고 브래너 자신 또한 명실 공히 할리우드 흥행 감독 겸 배우로 자리 잡는다. 게다가 원작에 대한 충실한 이해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오락적 요소까지 곁들이고 있어 영화를 통한 셰익스피어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오슨 웰스(Orson Welles)와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er)의 뒤를 있는 감독으로 기대되고 있다.

   『헨리 5세』는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를 토대로 하여 쓴 역사극들 중에서 4부작의 마지막이 되는 작품이다. 왕권쟁탈로 인해 야기되는 내란의 비참함을 다루었던 이전의 역사극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단합되었던 영국왕조의 위엄과 영광이 강조되었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쓸 당시의 시기적 배경을 5막 도입부의 코러스 대사를 통해 암시하는 것은 이 극의 특징적 요소이다. 원래 코러스는 10~50명 규모의 사람들이 나와 합창을 하는 형태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규모가 작아졌고 셰익스피어 시대에 와서는 한명이 출연하여 각 장이 시작되기 전에 설명을 하거나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로 축소되었다. 코러스는 각 막의 서두에서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한 단면을 서술하면서 서사극적 효과를 창출해내는 플롯의 외적구조를 형성한다. 등장인물들은 코러스가 설정한 틀의 내용을 언어와 행동으로 채워나가는 내적구조를 이루어낸다. 이러한 설정은 이분법 구조가 아니라 독자, 관객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여 해설자 코러스의 지침서에 따라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상상적 공간의 영역을 마련해 준다.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아일랜드 출정으로 국가팽창주의가 고조되어 있을 때였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국가의 이미지 뒤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의견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이는 수세기 동안 잉글랜드에 합병되어온 웨일즈와 함께 곧 스코틀랜드도 병합되리라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므로 이 작품에서 헨리 5세가 이끄는 군대가 영군,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군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묘사한 것은 그 당시의 정치적 배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웨일즈인 플루엘린의 역할이 강조된 것은 헨리 5세가 웨일즈 출신이라는 사실과도 연관성이 있다. 수세기 동안 정치적 갈등 관계에 있던 이 국가들을 대변하는 각기 다른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 영국군대는 중세의 시민군 모병 제도를 시사한다. 이들의 국가적, 계층적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는 세계가 희극적으로 표현되면서 영국왕권의 강화라는 고양된 주제에 초점을 두는 서사극적 구조 안에 잘 어우러져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국력을 확장해 가는 강력한 군주제가 확립되기를 바라던 그 당시의 시대적 염원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헨리 5세』는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었다. 특히 승전과 종전을 간구하는 영국인들의 마음을 반영하면서 승전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던 올리비에의 영상화작업은 애국주의적인 공헌으로 인정되어 그는 영국왕실로부터 「경」의 작위를 받고 귀족으로 계급 상승하는 영광을 얻기까지 했다. 브래너는 지금 셰익스피어의 영화적 해석과 관련된 주인공으로써 논쟁하고 있으며 그 결과 브래너의 20~21세기의 영화적 연주는 견고하고 존경의 움직임에 서 있다. 브라나의 경력이 미미하더라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가 셰익스피어를 연구함으로 인해 발전된 윤곽을 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자아인 『헨리 5세』(1989)는 독창적인 것이었고 포스트모던의 모든 관객들에게 셰익스피어를 다시 부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헨리 5세』는 그의 첫 주요 셰익스피어 작품이며, 여기서 브래너는 초기의 예술적인 영화적 관습을 깨려고 노력하였다. 명백하게, 올리비에의『헨리 5세』(1944)는 중대한 작품이었고 그 영화의 영향은 브래너가 의식적으로 하는 언급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쪽 작품에서 헨리 5세의 “성자 크리스핀의 날” 연설은 수레에서 행해진다. 그리고 빗발치는 활은 영국 군대로부터 프랑스 군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브래너는 동등하게 그의『헨리 5세』를 현대 관객들에게 맞추려고 『플라툰』,『풀 메탈자켓』,『7월 4일생』같은 최근의 베트남 영화의 동지애적인 역할이나 슬로우 모션 효과를 그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추구하기 위하여 브래너는 올리비에 영화에서 삭제되었던 더 영웅적이고 국가적 마음을 나타낸 요소, 예를 들면 바돌프의 사형이나 하플레어(Harfleur) 전투에서의 연설을 포함하였다. 브래너의『헨리 5세』는 어두운 빛깔의 현대의상을 입은 코러스가 어두운 역사자료실에서 불을 밝히면서 대사를 시작하고 서서히 역사의 장면으로 이동해 간다. 이것은 자신의 주요 목적이 어둠속에 묻혀있던 과거의 중요한 역사적 상황을 관객에게 설명해 주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때문에 브라나의 코러스는 관객의 상상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관객의 역사적 인식을 확대해 보려는 역사해설자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코러스로 분한 데릭 자코비(Derek Jacobi)는 9번 등장하고 2번은 보이스 오버로 나온다. 코러스는 권력을 신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연극의 주체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둠으로써 비판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헨리의 도덕적 행위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즉 브레히트(Brecht) 연극의 “낯설게 하기”의 무대 감독과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으로부터 브래너의 『헨리 5세』는 극 전반에 만연해있는 우울의 강력한 감정과 임박한 충돌에 대하여 등장인물들의 딱딱하게 굳은 태도를 보여준다. 처음에 헨리의 등장은 궁으로 들어올 때 다스 베이더처럼 극적으로 어둡게 표현되었다. 뒤따르는 토론의 숨은 뜻도 매우 정교하다. 걱정의 눈빛,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 살며시 움직이는 카메라는 음모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가 진행될 때마다 각 장면들은 주인공들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완전히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프랑스 공주 캐서린(Emma Thompson)과 시녀 엘리스가 나오는 장면은 실크, 햇빛 비둘기 등으로 활기차고 아름다운 분위기이나 왕족들이 통로를 지나갈 때 방해받는다. 캐서린은 영군 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프랑스의 위태위태한 모습을 아버지(Paul Scofield)의 굳은 표정에서 발견하고 표정을 바꾼다.

    그러나 브래너가 자신의 영화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부득이 영화적 중요성을 위해 주인공들의 역할들이 있긴 하지만 브래너는 또한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관심을 둔다. 플래시백은 처음에 이러한 과심을 개인적으로 알려준다. 예를 들면 폴스타프의 죽음을 삽입한 것이다. 그것은 폴스타프(Robbie Coltrane)와 엑서터(Brian blessed) 사이의 연관성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새 군주가 여전히 아버지 보호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다. 헨리가 하플레어 성에서 항복을 받은 후에 안도하며 엑서터의 팔 안으로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이때 헨리는 말 위에 있고 카메라는 낮은 앵글의 클로즈업으로 헨리만을 잡았다가 그의 주변에 늘어서 있는 병사들 보여준다. 병사들은 지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이어서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해도 헨리가 위협하는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의 부대가 마을을 위협하겠다는 헨리의 협박이 단지 연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브래너의『헨리 5세』에서는 플래시백이 여러 번 사용된다. 피스톨과 님(Geoffrey Hutching)이 주막에서의 옛날을 회상할 때가 맨 처음의 플래시백인데 이때 유쾌하고 혈색이 좋은 폴스타프는 『헨리 4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애교 있는 대사를 한다. “살 찐 잭(Jack)을 버리는 것은 전 세계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에 왕자는 다소 물러서서 침묵을 지키는데 그의 표정은 불분명하다. 그리고 보이스 오버로 “버리지, 버리겠네.” 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폴스타프는 왕자의 우정을 재확인하려는 것처럼『헨리 4세 2』부에서 인용해온 대사인 “맙소사, 우리가 함께 밤을 새워…….한밤의 종소리를 함께 봤지요.” 라고 말하지만 헨리는 “나는 그대 같은 노인을 모르네.”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왕자를 잃었음을 깨달았을 때 폴스타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고통스런 과정이 이어진다. 이 장면은 할 왕자의 단호함을 보여주면서 그가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수순으로서 왕자 시절의 방탕한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주막 친구인 폴스타프를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렸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플래시백은 바돌프가 전장에서 도둑질을 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질 때 다시 주막 장면으로 플래시백 된다. 바돌프는 이전의 친숙한 농담으로 왕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왕자에게 왕이 되면 도둑을 교수형에 처하지 말아달라고 청한다. 할 왕자의 대답은 “아니 그대는 교수형에 처해져야 해.” 라는 대답에 대한 바돌프의 반응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이 처형은 원작에서처럼 보고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스크린에 펼쳐지는 가운데 왕은 그 장면에 있으며 눈물을 흘리며 옛 친구의 사형을 명령한다. 그는 개인적인 감정과 싸워야 하지만, 엄청난 애정을 거부하고 군주의 권위를 받아들이며 그의 가혹한 처사를 분명히 한다. 브라나의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과거와의 단절이 왕에게도 매우 고통스러운 것임을 보여주면서 왕의 정신적 성장과 심리적 독립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고 있다.

    틀림없이 영화의 전투 장면은 개인적인 차원이 앞서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메라는 헨리의 군인적 노력을 반영하는 행동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애진코트 전투 전날 밤 헨리 5세는 진영을 돌아보면서 왕이 군주로서 지니는 의무와 책임감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군인들을 “형제들, 친구들, 동포들” 이라고 부르며 통일국가에 대한 갈망을 표출한다. 헨리 5세는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전력 분투하는 영웅이지만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전투에 지쳐 있고 얼굴은 진흙으로 뒤범벅된 평범한 군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군주로서 지니는 명예, 권위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의 고독한 면을 잘 드러내는데 이는 권위적인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화려한 전쟁영웅의 이미지 부각에 몰두하였던 올리비에 영화와 다름을 나타낸다.

    성 크리스핀의 날(St. Crispin's day)에 행해진 헨리의 연설은 전투에 자신이 없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전투의욕을 심어주는 연설로써 이때 역시 헨리와 그의 말에 반응하는 병사들과 귀족들의 표정이 교차적으로 카메라에 잡힌다. 헨리는 올리비에의 영화에서와 달리 시종일관 병사들과 대등한 위치하여 올리비에의 영화에 나왔던 핏자국 없이 빛나는 하얀 갑옷과 펄럭이는 오색의 깃발들과 대조적으로 피와 진흙으로 얼룩진 채 진창 속을 뒹굴고 전투가 끝난 후엔 어린 소년병의 시체를 어깨에 맨 채 병사들과 전장을 벗어나는 주인공의 모습을 긴 이동촬영으로 잡는다. 전투가 끝난 후 헨리와 웨일즈 출신 플루엘린(Ian Holm)은 “버디무비”(두 사람의 긴밀한 우정을 다루는 영화)처럼 추억에 잠기며 서로를 안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헨리 5세가 웨일즈 출신이라는 사실과도 연관성이 있다. 수세기 동안 정치적 갈등 관계에 있던 각각 다른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군대는 중세의 시민군 모병 제도를 시사한다. 이들의 국가적, 계층적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는 세계가 희극적으로 표현되면서 영국왕권의 강화라는 고양된 주제에 초점을 두는 서사극적 구조 안에 잘 어우러져 있다.

    브래너는 올리비에보다 미장센(mise-en-scene) 면에서 큐브릭(Kubrick)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베드폴드(James Larkin), 글로세스터(Simon Shepherd), 요크(James Simmons) 등의 감동하는 얼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브래너는 1960년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서 큐브릭의 ‘개인화’ 전략을 차용한다. 스파르타쿠스와 함께 하겠다는 커다란 감정적 인식은 그가 그의 군대를 돌아다니며 모여 있는 군인들을 독려할 때 힘을 얻는다. 브래너는 이것을 차용하였다.『헨리 5세』영화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게 이서된 유혈” “군주의 힘, 새로운 사업가의 개성” “신중하게 의도적인” 등등의 평가를 내렸고 이런 평들은 브래너에게 유용하다. 『헨리 5세』의 서술 형식과 전기적 개입은 빠르고, 생동감 있으며 도발적인 대사가 풍부하다. 동시에 개인화 절차는 감정적인 배우들과 역설적으로 뛰어남의 아첨으로 이루어진다. 국가적 소명은 인물들을 변치 않는 영국인으로 만들며 영화에서 사회적, 정치적 논쟁으로 이동한다. 분명히 영화에서 성적인 부분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다. 음모자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동성애적인 흥미를 끄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bedfellow), 더 이상의 암시는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 음악은 원문의 구조와는 맞지 않는 모호한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헨리가 그의 프랑스와 전쟁하는 목적을 신에게 지지해달라고 간청할 때, 낭만적인 후렴구가 부풀어 오르다 군주의 시도가 유쾌하지 못한 사실이 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헨리 5세』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관중들에게 국가적 서사영화의 획기적 재탄생이며 동시에 이념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조심스러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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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베스
로만 폴란스키 감독, 존 핀치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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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음산하고 피가 난무. 폴란스키의 감각적인 이 영화는 폭력의 수위가 충분히 높다. 영화를 만들기 전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의 부인이자 미모의 영화배우였던 임신한 샤론 테이트를 챨즈 만슨(Charles Manson)과 그 〈패밀리〉가 학살했다(1969년 8월 9일)

   또 이 영화는 플레이 보이 사장인 휴 헤프너가 자금을 대어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스키에게 그 영화는 자신이 오랬동안 소망했던 세익스피어 영화를 만들 꿈을 실행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그 영화를 논평하기를 “자극적인 상품” 이라고 했다.

   영화 작업은 1970년 11월에 시작되었다. 사실과 공상 사이에서, 영화를 만드는데 그의 개인적인 비극이 불가피하게 혼란을 주었다. 관객들은 던칸과 샤론 스텐의 살인 사이의 연관성, 또한 플레이보이사가 지원하니 소프트 포르노를 기대하며 극장으로 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텍스트는 이미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들어있었다. 수없이 되풀이 하는 피의 이미지는 전에 찰스 맨슨이 잔인하게 샤론테이트를 죽이기 전에 있었다. 그리고 레이디 멕베스가 잠옷을 입고 걷는 장면은 플레이보이의 에로티씨즘라기보다 순결하고 그녀의 불쌍하고 상처받기 쉬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bernice kliman은 폴란스키가 심지어 폭력적인 면을 덜 표현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에서 폭력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예로, 곰이 나오는 장면이나 레이디 맥더프 아내가 강간을 당하는 장면은 고상한 관객들을 위해 신중하게 보여주었다.

  콜롬피아 픽쳐스는 자막을 세익스피어 대사에서 40%만 사용했고 삭제된 텍스트는 보여지는 이미지의 배열로 대체되었다. 폴란스키는 제피릴리나 17세기 플랑드르 화가(화려하면서도 자연의 영상 그리기에 투철, 세밀)들처럼 사실적인 가구들, 교수형, 고블렛 잔 등의 미장센을 채워넣었다.

영화에서, 맥베스의 성은 물건들과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엑스트라는 수례를 밀고, 돼지를 옮기고, 계단을 쓸고 닭에게 모이를 준다. 뜰에는 거위, 개, 사슬에 묶인 곰, 매 등 수많은 동물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말의 울음소리, 수례바퀴의 삐그덕 소리, 사슬이 철컥소리, 갈매기 꽥꽥거리는 소리, 거위 울음소리, 초인종소리, 닭들 꼬기오 소리, 물 첨벙대는 소리, 군사들 불평소리, 헉헉대는 소리, 개짖는 소리, 문 삐그덕 대는 소리 등으로 충만하다.

그 사운드트랙은 디제시스(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이야기의 외연적 요소(연기, 대사 등)에 의해 구성되는 허구의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이야기 재현 미메시스.)를 관통하고 있다.

   프리 크리딧 씬에서(오프닝 씬 전, 주요 사건의 전조 암시)마녀들의 행위는 따라오는 일들의 전조를 암시한다. 먼저, 해가 흐릿하게 떠오르고 황량한 해변에서 두명의 늙은 노파와 젊은 여자가 나타난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황폐해진 수례에서 올가미와 잘린 팔을 땅속에 묻는다. 손에는 단검을 쥐어주고. 그리고 그 위에 피를 뿌린다.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 노파와 여자가 수레를 끌고 사라지고 안개 사이에서 제목이 보였다 사라지고, 귀에 거슬리는 바이올린과 백파이프 노래가 들린다. 그리고 안개가 계속 보이는 가운데 말 울음소리, 비명지르고 신음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안개가 흩어진 후 죽거나 상처입은 상처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한 병사가 상처입어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고 발을 당겨 그가 움직이자 철쇠구술로 등을 쳐서 죽인다.

   이 안개의 이미지는 극 중간에 다시 나타난다. 맥베스 앞에 칼이 둥둥 떠 있을 때. “Is this a dagger which I see before me?"

   메달과 체인 이미지 또한 전조를 암시해준다. 반역죄로 잡힌 코더 영주는 목에 철로 된 체인을 두르고 성 난간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또한 멕베스가 왕이 되고 난 후 연회시작 전에 곰의 목에 체인을 씌우고 사람들이 구경하는 장면이 있을 때 사용된다. 나중에 맥베스는 레녹스의 메달을 일을 잘 수행한 seytom에게 준다.

   극 초반에 전쟁이 끝난 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에 매달려 죽게되는 장면은 “골고다”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이 세계가 냉혹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극에서 채찍, 교수대 등으로 나타나는 폭력성을 폴란스키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멕베스의 겉으로 보여지는 고통과 내면의 고뇌가 있다.

   활발한 데쿠파주는 (시나리오를 분할·분석하여 세밀한 촬영대본으로 작성하는것) 공포로 강화된다. 살해된 banguo가 등을 도끼로 맞아 시냇물 속으로 떨어질 때, 도끼가 그의 등에서 떠오른다. 잠시후 체인에 감긴 곰이 보이고 야만스러운 개들이 동물을 무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지켜보는 레이디 멕베스의 얼굴은 마치 잔인한 그 광경이 그녀를 에로틱하게 흥분시킨 것처럼 반은 흥분되어 있고 반은 만족하는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시체가 된 곰은 복도를 통해 끌려가고 곧바로 하인들은 물을 뿌리고 지푸라기를 덮어 깨끗하게 만든다. 그후에 멕베스는 반코우의 유령을 보고 와인잔을 떨어뜨리는데 이때 레녹스가 얼른 그 얼룩을 닦아내어 바닥을 깨끗하게 한다.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이러한 강박으 레이디 맥베스의 헛된 소망에서 되풀이된다. 그녀는 손을 씻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가 이 작은 손을 씻게 하지 못하는구나” 한다.

   또다른 폴란스키의 전략은 그가 언급했듯 “ 일들이 꽤 맞지 않을 때 실제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적 조화와 부조화의 섞임은 멕베스가 왕이 되고 난 후 연회를 베풀 때 잘 나타난다. 멕베스는 마피아 갓파더처럼 관대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선의 완성으로, 만약 “ 반쿠오가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며 벤쿠오를 위해 건배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재빨리 빈 좌석을 보여주고, 잠시후 멕베스가 좌석을 봐을 때 그 좌석은 다시 차 있다. 카메라는 완전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멕베스에게 빈자리를 권하지만 그에겐 사람의 등이 보인다. 그는 당황하며 “where"이라고 묻고 귀신이 뒤를 돌며 얼굴에서 손을 떼며 왕을 응시한다. 그것은 살해된 밴쿠오이다. 공포에 빠진 왕은 와인잔을 떨어뜨리고 ”누가 이런 장난을 해놓았느냐“며 소리친다. 이 장면은 예술적 성공으로 적절한 ” doesn't quite fit in" 인 것이다.

  Rosss라는 인물은 영화속에서 주변을 뱅뱅 돌며 나타난다. 그는 코더 영주를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잽싸게 멕베스를 따라다닌다. 그는 멕베스의 명령에 따라 레이디 멕더프와 아이들을 죽인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기회주의자이다. 마지막에 멕베스가 멕더프에게 목을 베이자, 그는 왕관을 주어 말콤에게 바치며 “ 스코틀랜드의 왕 만세” 라고 외친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멕베스의 머리가 잘려 막대기 위에 꽃힌채 병사들이 야유하는 장면을 빙글빙글 돌며 주관적으로 보게 된다. 카메라가 우리가 멕베스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흔들리며 보여준다. 이제 영화는 평화를 맞이한 것 같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외국으로 도망갔던 도널베인(던칸의 두 아들 중 한명)이 마녀들의 동굴을 지나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은 악의 순환은 다시 시작되며 냉혹한 시대에 거대한 메커니즘처럼 아마도 왕위는 다시 강탈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폴란스키는 결코 세익스피어인 척 하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를 잘 이용한 천재적인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영화의 마술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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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 리어왕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감독 / 에이치디엔터테인먼트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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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덴마크 북부 저트랜드 겨울에 촬영되었다. 브룩의 킹리어는 불편한 이야기이다. 화를 잘내는 늙은 왕이 바보같은 결정으로 그의 재산을 은혜를 모르는 딸들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서구의 부모들은 어디서나 일상에서 그들의 자녀들과 다툰다. 헤어스타일에서 자잘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리어왕처럼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라고 소리치길 원한다. 이 극은 베케트의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은 대체로 무언극,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뜻이나 목적이 없으므로 인간은 서로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종래의 극형식이나 이론 정연한 대화 따위는 벗어 던지고 논리도 없고 뜻도 없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침묵까지 사용하여 인간 존재의 뜻 없음을 전달한다.)

   이 영화는 아이러니를 반영하고 , 균열된 우주를 히로시마 폭발 후에 대재난처럼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어두운 시각은 브룩에게 비평가들의 많은 분노를 가져왔다. 그 영화는 “시적이지 않고, 서투르며, 슬픈 타락이며, 재난당한 지역으로부터 밀반입되어 온 과다 노출된 8mm 홈무비처럼 보인다” 등의 평을 받았다. 미국의 영화 비평가 pauline kael은 심지어 dislike가 아니라 hate it (증오)이라고 표현했다. 반면에 몇명은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포커스를 벗어났다는 것을 이해했고 상상력의 훌륭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세익스피어 리어 왕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외골수적인 시각을 지닌 것이다. 리어왕은 심도 깊은 포스트 모더니스트 요소, 최첨단의 예술기법-손에 드는 카메라, 조명과 사운드, 우수한 필름 제작-등으로 제작자가 세익스피어 극을 다시 상상하는것을 자유롭게 했다. 고의적인 아웃포커스(주제를 돋보이도록 배경을 흐릿하게 하는것)는 끊임없이 엄격한 North Jutland의 겨울 풍경을 흑백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고의적으로 정신착란의 전략을 사용하여 헐리우드 영화처럼 매끈한 부분을 없애버린다. 이 영화는 관중들을 불편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장 뤽 고다르(네 멋대로 해라, 점프컷 사용)처럼 -씨네마적 단절을 사용하여 익숙한 형태에서 멀리 벗어났다-브룩은 불연속적성, 줌페이드, 움직임의 가속화, 움직이지 않는 프레임, 충격적인 편집, 복합적인 역 앵글 숏, 오버 더 숄더 샷, 몽타주, 점프 컷, 오버헤드 샷, 조용한 스크린 타이틀, 눈만 클로즈업하기, 헨드 헬드(소형) 카메라 등을 사용한다. 영화에서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사라지고, 단지 스크린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몇가지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는 지도가 늙은 왕의 헛된 여행을 상징하고 거울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거울은 생략되었고 지도는, 결코 왕이 지도를 가져오라고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딸 거너릴에게 왕궁의 1/3을 줄 때 땅바닥에 펼쳐질 뿐이다. 이 지도는 보풀이 일고 얼룩이 져서 흐릿하며 초라하다 거너닐은 정의와 국왕의 상징인 동그런 구를 위로 높이 들고 그녀의 충성심을 증명한다. 움직임없이 귀에 거슬리는 듯한 목소리로 폴 스코필드가 맡은 회색빛의 리어왕은 느리게 자식들에게 그의 권력 양도의식을 실행한다.

다음으로 뽐내듯이 리건이 신성하게 구를 들고 등장하고 왕국을 상속받기 위해 아첨의 말을 한다. 코델리아는 홀로, 고독하게 뒤에서 남아있고 그녀의 차례를 기다린다. 마침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의 말은 단지 “ Nothing my lord" 이다.

오프닝 씬과 엔딩씬은 침묵으로 이 영화를 시작하고 침묵으로 끝맺는다. 브룩은 음악을 최대한 잘라내었다.

    첫 오프닝씬은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비췬다. 이것은 머리에 대한 탐사로, 그들은 꼼짝 않고서, 침묵하며 수수께끼처럼, 무를 응시한다. 오프닝에서 어떤 숏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다가 리어왕이 화가나서 작은 문을 박차고 나갈 때야 비로소 그들이 문밖에 있었음에 알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야 그들이 왕의 100명의 기사들인 것을 알게 된다.

   외부 샷은 왕의 영혼적 고뇌를 상징한다. 말은 얼어 붙은 길을 가고, 마차는 풍경속에서 흔들거리며 고집쎈 기사들은 단체로 이동하고, 음산한 지역을 지나간다. 글로세스터 궁 근처의 황야에서 리어, 광대, 에드거는 복잡한 변화를 유발한다. 천둥이 치고, 몰아치는 빗속에서 비를 맞으며 떨고 있는 미친 톰으로 분장한 에드거는 예수를 나타내는 듯하다. 카메라는 무례하게 그의 벗겨진 상체, 배, 사타구니를 낱낱이 보여준다.

  용서, 겸허, 동정과 같은 기독교적인 가치들은 부조리주의적 상징들과 조망속에 구현될 뿐, 갱생의 비젼은 사라졌다. 리어왕을 향한 광대의 조롱은 왕이 부정하는 깊은 심연을 뚫고 지나간다. 어떤 등장인물도 광대처럼 기독교의 역설을 잘 나타내주지 않는다. 지혜 속에 어리석음, 어리석음 속에 지혜, 눈멈과 시야, 죽음안에 삶, 삶속의 죽음, 패배속의 승리, 승리속의 패배.

  부조리주의극으로써 초월하는 촉매는 베케트의 연극처럼 미쳐버린 리어왕이 눈이 먼 글로우세스터를 응시할 때 나타난다. 크레인숏으로부터 그들은 흐릿한 풍경에서 작게 보여지며 모든것을 빼앗긴 외롭고 힘없는 남자들의 위치를 보여준다.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원인과 결과, 선과 악, 성경의 욥처럼.

   마지막 부분에 공포는 극대화된다. 영화는 점 점 더 어두워지고 야만적으로 되어간다. 리어는 왼쪽, 오른쪽으로 프레임이 옮겨지며 촬영되고 톰의 클로즈업 샷과 롱샷들이 번갈아 나온다. 또한 카메라는 물체들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단순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수가 없다.

   리어왕을 습격하여 전쟁으로 얼굴이 더러워지고 지친 거너릴과 리건은 에드먼드를 차지하기 위해 말다툼을 벌인다. 에드가와 에드먼드는 도끼를 들고 싸우고 에드거는 단 한번의 도끼질로 에드먼드를 죽인다. 고너릴은 리건을 땅바닥에 내동뎅이쳐서 죽인다. 그리고 나서 고노릴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드레스를 짓이기며 몸을 흔들다가 스스로 머리를 바위에 부딛쳐 자살해버린다. 이 충격은 단두대 위에서 교수형에 쳐에지는 코딜리아의 짧은 샷으로 이어지는데, 글로스터의 실명과 이에 뒤따를 살해들은 너무도 빨리 진행되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왕은 팔에 코델리아를 품에 안고 불모지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며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울부지는다. 그는 코델리아가 살아있는 것처럼 환각을 일으킨다. 마지막 망상은 미친 노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브룩의 영화는 많은 것을 캐묻지만 대답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황폐한 왕은 점점 냉혹하게 세상 밖으로, 프레임 밖으로 떨어진다. 그가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 카메라는 리어의 얼굴에서 어깨로, 그리고 텅 빈 회색의 하늘로 팬하며 마침내 오직 하얀 빛으로 가득찬 화면만이 남는다. 개인의 파멸 뿐 아니라 자연과 사회도 소외된 채, 자연적인 지속이나 재생의 느낌도 없이 황량한 이미지를 증폭하면서 구제할 수 없는 공허함과 침묵만을 남긴다. The end 라는 형식조차도 없이 이 필름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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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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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캐스트에서 타인의 취향 이란 글을 읽었다. 영화도 같이 소개해 놓았는데, 관심이 가서 얼른 찾아보았다. 1999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대충 정리하자면 주인공 카스텔라는 한 회사의 사장. 예술에 전혀 문외한인 그는, 어느 날 그가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가서 감동을 받았는데 그 주연배우 클라라가 자신의 개인 과외 영어 선생님임을 알게 된다. 그는 클라라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를 통해 연극과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적인 클라라의 취향이 아니다. 그녀는 그를 무시한다. 자신의 취향과 너무 맞지 않기 때문에.

   한편으로 카스텔라의 아내는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는 여자이다. 집을 온통 꽃무늬와 분홍색으로 꾸미며 자신의 애완견이 다른 사람을 물어도, 그건 그 사람이 멍청하거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취향만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그러면서 각자의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아가게 된다. 꽤 재밌고 괜찮은 영화다.

   보는 내내 나도 카스텔라의 아내나 클라라처럼 내 취향만 고집하고, 남들을 은근히 무시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카스텔라의 보디가드로 나오는 프랑크의 삶도 인상깊다. 그는 전직형사로 동료와 부패한 정치인을 잡으려 했으나 위의 압력으로 조사를 못하게 되자 경찰서를 떠난다. 그러나 그의 동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에 남는다. 프랑크는 사회가 더럽고 부조리하다고 하지만(옛 애인의 배신도 있었기에), 그의 애인이자 레스토랑의 종업원인 마니는 프랑크가 뒤에서 비판만 할 뿐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카스텔라 운전기사인 브루노는 프랑크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나 실패할 뿐이다. 브루노도 미국으로 유학 간 애인이 미국에 남겠다고 편지를 보내자 고통스러워하나 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중간중간에 그의 끔찍하고 서툰 플룻 연습이 나오고, 마지막에 그가 아마추어 단원들과 화음을 맞춰 플룻을 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 내내 바보같고 답답했던 그가 다시 보였다.

  타인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내 멋대로 그들의 취향을 평가하고 깎아내릴 때가 많다. 특히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다른 이의 옷 스타일을 보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에 따라 그를 내 맘대로 정의내린다. 아, 멋진 사람이구나. 혹은 너무 재미없다.

  마음이 뜨끔하다. 내 취향은 사람들이 보기엔 고상하지만 따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상한 것은 따분하다는 공식이 은연중 있는 것 같다. 클래식 음악, 고전 소설이나 영화, 홍차 등등.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후 그것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사실 호기심이 많아 남들의 취향에 관심을 갖고 잘 듣는 편이다. 헤어지고 나면 무시할지라도. 나에게도 고정관념이 있다. 오락, 트로트, TV, 이런 것들을 하찮게 보는. 편견없이 사고한다는 것이 얼만 어려운지.

  나는 깔끔한 것이 좋다.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돈된 공간에서 있는 것이 좋다. 시끄러운 음악보다는 조용하고 악기만 연주하는 음악이 좋고, 족발, 닭발, 곱창, 육회같은 걸쭉한? 음식보다는 과일, 빵, 면 등이 좋다. 화려한 장식은 되도록 피하고, 단색으로 된 옷이나 소품이 좋다. 나의 취향 또한 누군가를 만족시켜주거나 실망시킬 것이다. 전혀 다른 취향의 사람과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친구가 되고 싶어도 내가 있는 활동범위 안에서 그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다들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나보다. 어떤 취향을 가졌듯 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도록 더 애써야겠다. 취향으로 그 사람의 마음까지 판단하는 실수를 버리자. 역시 겸손은 어디에서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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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 김태우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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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영화를 다운받았다. 오랜만에 한국 영화 좀 볼까 하는 마음에서. 홍성수 감독의 영화는 몇 편밖에 보지 못했다.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해변의 여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영화들은 영화 같지 않다.

   일상의 삶을 너무나 사실적이고 노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불편함이 든다. 프레임 속 색채는 칙칙하고, 카메라가 들이대는 거리와 사람들은 평범하고 추하다. 가끔 내가 걸었던 길이나, 장소들도 등장하는데 저렇게 예쁘지 않은 곳이었나 싶을 정도이다. 배우들도 전혀 예쁘지 않다. 화사한 조명도 없고, 아름다운 의상도 없다. 본연의 얼굴과 목소리로 승부할 뿐이다. 지금까지 본 영화들에서는 남녀관계가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하였다. 남녀간의 사랑도 낭만적이지 않다. 주인공들은 너무도 유치하고, 현실적인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고,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사랑을 들먹인다. 영화는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인간 마음속의 이기심과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에도 이런 감독이 있다니 좋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김태우(김헌준)와 유지태(이문호)가 학교의 선후배로 나온다. 김태우는 홍상수 영화에서 자주 보이고, 유지태는 처음이다. 잘생기고 멋진 유지태가 이 영화에선 40대의 후줄근한 아저씨로 변해버린다. 이것이 과연 의상만으로 가능한 건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지태는 평범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사람이 유지태이다 마음속으로 생각을 하고 봐야 했다.

   헌준은 연극영화과이고 문호는 미대생이며 헌준의 애인 성현아(박선화) 역시 그림을 그린다. 헌준은 선화와 사랑을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기보단 그녀의 몸을 원해서이다. 헌준은 선화를 남겨둔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선화를 짝사랑하던 문호는 이 틈을 타서 선화와 연인이 된다. 시간은 흘러 문호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대학 강사이며 헌준은 미국에서 잠시 돌아와 문호를 만난다. 술을 먹다 그들은 지금 선화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추억을 떠올리다 선화를 찾아가기로 한다. 부천에 있는 한 호텔에서 바를 경영하고 있는 선화. 그녀를 본 둘은 어떻게 하면 선화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궁리한다. 결국 두 명과 차례로 잠자리를 같이 한 선화. 아침이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헌준은 그녀가 깨끗하지 못하다며 화를 내고 떠나버리고 문호는 선화에게 아무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한다.

   그들의 뻔뻔함. 조금만 괜찮은 여자가 있으면, 자신이 영화감독이라고, 그림을 그린다며 모델이 되어 줄 수 있냐고 작업을 걸고, 제자와 자고, 옛 애인을 버리면서 선화에겐 깨끗하지 못하다며 비난을 하는 그들의 이중성. 왜 많은 남자들은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도 자고 싶어할까? 남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가 더 적극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여성은 감정의 나눔을 통해 교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성은 몸을 통해 교감을 하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생각의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육체적 관계가 사랑을 제외하고, 그보다 가벼운 즐거움을 위해 행해진다면 행위가 끝난 후 허전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다시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인가?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카메라로 옮겨놓아 작품을 만드는 홍상수 감독. 재주 참 좋다. 그의 영화가 불편하여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일까? 재미가 없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인공적인 요소가 없어 예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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