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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행복을 찾기 위한 어느 기자의 여행기. 이토록 품위 있고, 유머 넘치고, 깊이 있는 여행기를 쓸 수 있다니. 롤랑 바르트의 일본 예찬을 담은 <기호의 제국>만큼 감탄하며 읽은 여행기.
*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시간이 아주 많다. 유럽의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전혀 죄책감 없이 아주 오랫동안 빈둥거리는 것. 위대한 철학자들이 대부분 유럽 출신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마음대로 떠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근본적으로 새로운 철학, 예를 들면 실존주의 같은 것이 머릿속에 펑 하고 떠오를 때까지. 16
* 스위스인들이 행복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스위스인들은 시기심이 행복의 커다란 적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기심을 짓밟아버리려고 한다. 디터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한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밝은 조명을 비추지 말자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랬다가는 총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스위스인들은 돈 얘기를 싫어한다. 자기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곤지름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스위스 라마들은 심지어 돈을 뜻하는 ‘money'의 'm' 자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냥 손가락 두 개를 비비는 것으로 돈이라는 단어를 대신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스위스의 경제가 금융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알기로, 금융업은 돈과 관련된 사업이다. 하지만 스위스인들은 돈만큼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53
* 참을성과 권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권태 중에는 사실 성급함이라고 해야 옳은 것도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싫고, 세상이 재미없어서 지루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권태는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세대는 소인배의 세대, 서서히 움직이는 자연과 심히 유리된 사람들의 세대, 생기 넘치는 충동이 죄다 꽃병에 꽂아놓은 꽃처럼 서서히 시들어가는 세대가 될 것이다.”
스위스인들이 사실은 지루하지 않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밖에서 보기에 지루하게 보일 뿐이다. 67
* 그는 기품있게 예의를 지킨다. 마치 18세기 귀족 같다. 그는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내 가방을 들어주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 추격전이 벌어졌을 때 공중에서 그 뒤를 따르는 헬리콥터처럼 내 주위를 맴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나를 업어 나르기라도 할 것 같다.
하지만 굽실거리는 태도가 아니라 품위 있는 자세로 이 모든 일을 해낸다. 부탄은 식민지가 되거나 정복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주는 친절은 담백하다. 이쪽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쓸데없이 굽실거리는 태도나 노골적으로 알랑거리는 태도가 없다. 86
* 아이슬란드인들에게는 이것이 맞는 말이다. 이 섬에는 사람들에게 어디어디가 부족하다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인들은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태도 때문에 아이슬란드의 예술가들은 엉터리 작품을 많이 만들어낸다. 그러고는 누구보다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엉터리 작품들이 예술의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이 엉터리 작품들은 농사를 지을 때의 거름 같은 역할을 한다. 엉터리들 덕분에 좋은 작품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엉터리가 없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물론 엉터리 작품이 화랑에 떡하니 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동네 식품점의 채소 진열대에 거름이 버티고 있는 걸 보기 싫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엉터리는 중요하다. 240
* 결국 문화가 문제인 것 같다. 문화는 우리가 헤엄치는 바다와 같다. 몰도바에서 그런 것처럼 바다의 물을 다 빼버리면, 우리는 숨을 쉴 수 없다. 자기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쾌락 적응도 작동하지 않는다. 루바는 러시아의 그림자라고 할 만한 땅에서 살고 있다. 이 땅은 러시아이기도 하고 러시아가 아니기도 하다. 원래 몰도바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들도 자기 나름의 그림자 나라에서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루마니아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점에서.
몰도바에 관한 책은 거의 없다. 그중 한 권의 저자인 찰스 킹은 이 나라를 가리켜 ‘조약으로 만들어진 나라’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허구의 나라라고. 이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317
*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해외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결국 인도로 돌아왔다. 왜일까?
“이곳은 예측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들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놀라운 대답이다. 우리 서구 사람들은 예측이 불가능한 것을 위협으로 보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직업, 가정, 도로, 날씨 등 모든 것을 철저히 예측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확실한 것을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임의성이라고는, 아이팟에 저장된 곡을 무작위로 듣는 수준이 고작이다. 415
* 내가 가본 곳, 내가 만난 모든 사람 중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부탄의 학자이자 암을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인 카르마 우라.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철저히 관계 속에 존재해요.”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마가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 말을 했음을 안다. 우리의 행복은 전적으로, 철저히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가족, 친구, 이웃, 게다가 우리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무실 청소부까지도 모두. 행복은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접속사다. 연결 조직. 4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