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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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듯 보이는 詩 마지막 행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절망의 자리서 의지를 다지며
첫 행처럼 ‘희망을 노래’한 셈
 


기형도(1960~1989)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전문 

 

기형도 문학관 전면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에 대해 노래하련다”라고 쓰인 대형펼침막이 걸려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정거장에서의 충고」 첫 행이다. 기형도는 문학과지성사로부터 시집 출간 제의를 받고, 시집 제목으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시집은 유고시집이 되면서, 시집 해설을 쓴 김현이 정한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출간됐다.

기형도가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시집 제목으로 생각한 것은 제목 자체의 뉘앙스도 있었겠지만, 그 시가 가지는 의미도 고려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로 끝나는 이 작품은 절망적 정서가 짙게 배어있다. 그렇다면 첫 행에서 말한 ‘희망’은 단지 절망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니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비가 왔으면 싶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 전에 나에겐 부재(不在)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때라니? 그랬다. 나는 더 이상 시에 접근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그건 성(聖)도 아니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탈출 위에 있다. 나는 부닥칠 것이다. 공허와 권태뿐일 것이다.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

“노트를 펼치다가 놀랐다. 표지에 hope라고 씌어 있었다. 내 여행이 ‘지칠 때까지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였다면 이 노트 또한 내 의지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다. (중략) 서울에서의 나의 행복론은 산산조각 나고 있다.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들은 1988년 여름 그가 간절하게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희망은 자신의 변화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절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심 많은” 그의 내면에는 “불안의 짐짝들”이 희망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에게 희망이 찾아올 때마다 불안은 그것이 정말로 네가 갈 길이냐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 아니냐고 속삭여왔음을 암시한다.

이제 그는 짐짝처럼 거추장스럽고 오래된 불안을 내던질 방법은 (흉기처럼 단단한) 혀나 (딱딱한) 손 즉, 말과 글이 아니라 몸과 행동에서 나오는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육체가 벌써 누추해졌다고 느끼며 급기야 불안의 짐짝들에게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자포자기에 빠진다. 정거장에 주저앉아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중얼거린다. 모든 길이 있으나 아무 길도 선택할 수 없는 그는 욕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려 한다. 희망을 방 안에 가둠으로써 욕망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그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희망이란 말을 꺼내려면 "미안하지만"이라는 사과 혹은 양해를 구하는 말을 앞세워야 한다. 그래서 첫 구절은 너무 오랫동안 절망만을 오래해온 자의 전향서처럼 들린다. 오랜 절망은 희망이 다가올 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절망은 우선 중학교 때 겪은 누이의 끔찍한 죽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그 사건 때문이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의 시는 절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 희망으로 전향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써온 시에 대해 '미안한'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또 하나는 80년대의 청춘들에게 공통적인,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성이 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라고 내뱉는다. 

희망을 노래하겠다고 시작한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절망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진술은 표면적으로는 항복선언이지만, 동시에 다른 전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싸움을 시작한다는 선전포고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희망을 찾기 위한, 시에 다시 다가서기 위한 몸부림의 기록인 「짧은 여행의 기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중략)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 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겪은 시인이 80년대의, 자신의 20대의, 고갯마루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방향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가 참여시(혹은 민중시)와 순수시를 아우르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글이나,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남긴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라는 말도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어가려는 희망을 내비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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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 시절 나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논술’은 끔찍이 싫어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틀에 맞춰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글 속에서 ‘나다움’이 사라져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들이 피어올랐다. 나는 본문에서는 버려질 것이 빤한 잡생각들을 일일이 메모하며 ‘아, 이런 게 정말 나다운 것인데!’라며 홀로 안타까워했다.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난 다양한 곁가지 생각들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 자꾸만 본문 바깥, 생각의 갓길에서 한껏 노닥거리고 싶은 충동. 글쓰기뿐만 아니라 인간도, 인생도,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잡생각’이, 메인 테마를 벗어난 ‘잡음’ 같은 의외의 사건들이 우리 삶의 계획된 항로를 뒤엎곤 한다. 논리가 이끄는 대로만 충실히 글을 쓴다면 ‘문학’이 탄생할 수 없을 것이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이익’이나 ‘합리’를 향해서만 나아간다면 역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글쓰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외성과 불합리를 인간 사유의 근원적 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끊임없이 ‘논지에서 벗어난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무 이유 없이 변칙적으로 논지를 이탈한다. 바로 그 들쑥날쑥함과 셀 수 없는 오류들이 이 소설을 읽는 진정한 매력이며,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19세기 최고의 ‘지하 인간’의 결정적 본성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사유 자체에 내재된 모순과 분열, ‘계몽된 이성’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재단할 수 없는 예측 불능의 인간형을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아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려 20년 동안 그야말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으로부터 ‘잠수’를 해버린 은둔형 외톨이다.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오직 치열한 독백 같은 글쓰기뿐이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결코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 그런 인간이다”라는 소설의 첫 대목은 마치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주인공이 ‘그칠 줄 모르는 악의’라는 영혼의 불치병을 앓게 된 과정, 그리고 오직 ‘책’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고독한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닮은 음울하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주옥같은 문명비판의 목소리를 토해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9세기 중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러시아사회에 던지는 거대한 물음표였다. 합리적 이성과 물질문명의 진보에서 희망을 보던 계몽주의자들의 규범적 사유에 맞서, 도스토옙스키는 이성의 지하에 있는 인간, 계몽의 그늘에 있는 인간의 또다른 모습을 그려낸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다.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난 혼자인데 그들은 모두 닮았다!’는 생각 때문에 평생 괴로워한다. 혼자 있을 때조차 이 세상 모두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인간, 그러나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지하인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직 생각 속에서만 소통을 꿈꾸고, 생각 속에서만 세계를 바꾸고, 생각 속에서만 타인을 사랑한다. 그의 유일한 동무는 ‘책’뿐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마치 레고 조립을 하듯 손쉽게 세계를 창조하고 순식간에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몽상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접속’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 또한 바로 세계다. 그는 참을 수 없이 세계를 갈망하지만 세계와 만날 수 없고, 참을 수 없이 소통을 갈망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지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히키코모리’의 문화적 원형일 뿐 아니라, ‘함께 있음의 고통’도 ‘혼자 있음의 고립감’도 견디지 못해 남몰래 신음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숨어 사는 ‘지하’는 단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의 ‘지하’다. 우리가 차마 내보이지 못하는 마음의 지하, 그것은 단지 분석과 치료를 기다리는 마음의 질병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순수한 원형이자 버릴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인간이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은 그가 숨김없이 토로하는 영혼의 지하감옥이 우리 자신의 ‘말할 수 없는 비밀들’과 소리없이 교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우리들 저마다의 마음에 숨겨진 ‘영혼의 지하실’을 일깨운다. 어제 참은 우리의 분노는, 오늘 겪은 우리의 절망은, 또 어떤 영혼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은밀한 부활을 꿈꾸는 것일까.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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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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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쓰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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