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욱도 이동하지 않
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聖)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똑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는 기형도 시인의 등단 직품이다. 작고한 김현 시인은 그의 시를 두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미학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가 일상을 낯설게 혹은 기괴하게 만드는 것을 한 말일 것이다.

안개는 읍의 명물이다. 산업사회의 암울한 시대적 표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서정성이 짙은 안개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낯설고 잔혹한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안개가 끼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반복되는 일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는 일상의 반복을 습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안개에 노출된 사람들은 오염된 폐수와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이 안개를 이루고 사람들은 습관처럼 무감각하다.  그런 후 문득 안개속에 있다는 것을 경악한다. 이 시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것은 시적 화자가 추억하는 곳이 이미 지상에 없기 때문이다.

읍의 사람들이 미친듯이 흘러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그 이유를 타인의 불행에 무감각하거나 침묵하는 집단적인 무의식을 안개로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은 오히려 낯설고 드문 일인 것이다.

기숙사옆에서 간밤에 겁탈당한 여공이나 쓰레기더미에서 얼어 죽은 취객의 개인적 불행은 역설적으로 안개 탓은 아니라는 말은 안개 탓으로 읽힌다. 그래서 안개는 개인적 불행에 침묵하는 시대적 표상이고 공장의 굴뚝 연기는 하늘을 향에 총신처럼 겨눠져 있다. 

산업사회의 무분별한 개발 논리의 시대적 표상을 서정성이 짙은 안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기형도 시인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미학의 탁월한 묘사를 보여준다.

몇가지 사소한 사건이라고 말한 여공의 겁탈 사건과 얼어죽은 취객은 안개가 지배하는 그 시대의 삶을 기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역설적인 진술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쓰레기 취급 받는 부패와 오염의 일상적인 삶의 부작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공장에 가듯이 누군가 안개 속에서 죽고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공장으로 간다. 이렇게 시대적 불행이 반복되는 뒤틀린 일상이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기숙사 옆에서 겁탈당한 여공의 불행과 쓰레기더미에서 얼어죽은 취객의 개인적 불행이 있는 안개는 걷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이 고장의 명물은 개인적인 불행에 무감각한 안개가 될 것이다.    



출처 : https://m.blog.naver.com/sllim13/22104323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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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1983)

 

󰏊 작품 감상의 길라잡이 󰏊


이 작품은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쓸쓸한 기차역 대합실의 정경을 통해서,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추억아픔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이 시의 화자와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화자는 밤늦게 막차를 기다리며 겨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에서 지친 군상(群像 떼를 지어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피곤에 지쳐 조는 모습감기에 걸려 쿨룩거리는 모습침묵하는 모습들에서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깊은 응시 속에서 시는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이는 78행의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라는 서정적 표현에 의해 뚜렷이 드러난다이 표현은 사실 시 전체 분위기의 중심이라 볼 수 있는데마지막에는 약간 변주되어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에서 한 번 더 나타나며여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화자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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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ycar02 2022-05-07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곽재구 시인에 의해 세상에 나온 사평역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곽재구 시인의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평역은 같은 이유로 세상 모든 사람이 발붙이고 있어야 할 쓸쓸하고 눈 시린 공간이 되었다.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하여 사평역은 어디에든 있다.

- 서효인 시인

frycar02 2022-05-0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고통과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그것을 서정적인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사평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이야기 형식을 통해 전달하면서, 이들의 현실의 고통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그러한 상황을 주로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성과 예술성의 확보에 성공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 강신주 문학평론가
 

절망한 듯 보이는 詩 마지막 행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절망의 자리서 의지를 다지며
첫 행처럼 ‘희망을 노래’한 셈
 


기형도(1960~1989)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전문 

 

기형도 문학관 전면에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에 대해 노래하련다”라고 쓰인 대형펼침막이 걸려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정거장에서의 충고」 첫 행이다. 기형도는 문학과지성사로부터 시집 출간 제의를 받고, 시집 제목으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시집은 유고시집이 되면서, 시집 해설을 쓴 김현이 정한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출간됐다.

기형도가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시집 제목으로 생각한 것은 제목 자체의 뉘앙스도 있었겠지만, 그 시가 가지는 의미도 고려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로 끝나는 이 작품은 절망적 정서가 짙게 배어있다. 그렇다면 첫 행에서 말한 ‘희망’은 단지 절망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차라니 나는 내가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버리는 상태까지 가고 싶었다.”

“비가 왔으면 싶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 전에 나에겐 부재(不在)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때라니? 그랬다. 나는 더 이상 시에 접근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그건 성(聖)도 아니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탈출 위에 있다. 나는 부닥칠 것이다. 공허와 권태뿐일 것이다.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

“노트를 펼치다가 놀랐다. 표지에 hope라고 씌어 있었다. 내 여행이 ‘지칠 때까지 희망을 꿈꾸기’ 위해서였다면 이 노트 또한 내 의지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다. (중략) 서울에서의 나의 행복론은 산산조각 나고 있다.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들은 1988년 여름 그가 간절하게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희망은 자신의 변화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절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심 많은” 그의 내면에는 “불안의 짐짝들”이 희망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에게 희망이 찾아올 때마다 불안은 그것이 정말로 네가 갈 길이냐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 아니냐고 속삭여왔음을 암시한다.

이제 그는 짐짝처럼 거추장스럽고 오래된 불안을 내던질 방법은 (흉기처럼 단단한) 혀나 (딱딱한) 손 즉, 말과 글이 아니라 몸과 행동에서 나오는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육체가 벌써 누추해졌다고 느끼며 급기야 불안의 짐짝들에게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자포자기에 빠진다. 정거장에 주저앉아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중얼거린다. 모든 길이 있으나 아무 길도 선택할 수 없는 그는 욕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려 한다. 희망을 방 안에 가둠으로써 욕망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그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희망이란 말을 꺼내려면 "미안하지만"이라는 사과 혹은 양해를 구하는 말을 앞세워야 한다. 그래서 첫 구절은 너무 오랫동안 절망만을 오래해온 자의 전향서처럼 들린다. 오랜 절망은 희망이 다가올 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절망은 우선 중학교 때 겪은 누이의 끔찍한 죽음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그 사건 때문이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의 시는 절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 희망으로 전향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써온 시에 대해 '미안한'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또 하나는 80년대의 청춘들에게 공통적인,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그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내가 탐닉해온 것은 육체성이 없는 유령의 자유로움이었다."라고 내뱉는다. 

희망을 노래하겠다고 시작한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절망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진술은 표면적으로는 항복선언이지만, 동시에 다른 전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싸움을 시작한다는 선전포고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희망을 찾기 위한, 시에 다시 다가서기 위한 몸부림의 기록인 「짧은 여행의 기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중략)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 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겪은 시인이 80년대의, 자신의 20대의, 고갯마루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방향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가 참여시(혹은 민중시)와 순수시를 아우르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밝힌 글이나,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남긴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라는 말도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어가려는 희망을 내비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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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 시절 나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논술’은 끔찍이 싫어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틀에 맞춰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글 속에서 ‘나다움’이 사라져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들이 피어올랐다. 나는 본문에서는 버려질 것이 빤한 잡생각들을 일일이 메모하며 ‘아, 이런 게 정말 나다운 것인데!’라며 홀로 안타까워했다.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난 다양한 곁가지 생각들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 자꾸만 본문 바깥, 생각의 갓길에서 한껏 노닥거리고 싶은 충동. 글쓰기뿐만 아니라 인간도, 인생도,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잡생각’이, 메인 테마를 벗어난 ‘잡음’ 같은 의외의 사건들이 우리 삶의 계획된 항로를 뒤엎곤 한다. 논리가 이끄는 대로만 충실히 글을 쓴다면 ‘문학’이 탄생할 수 없을 것이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이익’이나 ‘합리’를 향해서만 나아간다면 역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글쓰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외성과 불합리를 인간 사유의 근원적 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끊임없이 ‘논지에서 벗어난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무 이유 없이 변칙적으로 논지를 이탈한다. 바로 그 들쑥날쑥함과 셀 수 없는 오류들이 이 소설을 읽는 진정한 매력이며,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19세기 최고의 ‘지하 인간’의 결정적 본성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사유 자체에 내재된 모순과 분열, ‘계몽된 이성’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재단할 수 없는 예측 불능의 인간형을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아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려 20년 동안 그야말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으로부터 ‘잠수’를 해버린 은둔형 외톨이다.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오직 치열한 독백 같은 글쓰기뿐이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결코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 그런 인간이다”라는 소설의 첫 대목은 마치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주인공이 ‘그칠 줄 모르는 악의’라는 영혼의 불치병을 앓게 된 과정, 그리고 오직 ‘책’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고독한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닮은 음울하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주옥같은 문명비판의 목소리를 토해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9세기 중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러시아사회에 던지는 거대한 물음표였다. 합리적 이성과 물질문명의 진보에서 희망을 보던 계몽주의자들의 규범적 사유에 맞서, 도스토옙스키는 이성의 지하에 있는 인간, 계몽의 그늘에 있는 인간의 또다른 모습을 그려낸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다.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난 혼자인데 그들은 모두 닮았다!’는 생각 때문에 평생 괴로워한다. 혼자 있을 때조차 이 세상 모두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인간, 그러나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지하인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직 생각 속에서만 소통을 꿈꾸고, 생각 속에서만 세계를 바꾸고, 생각 속에서만 타인을 사랑한다. 그의 유일한 동무는 ‘책’뿐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마치 레고 조립을 하듯 손쉽게 세계를 창조하고 순식간에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몽상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접속’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 또한 바로 세계다. 그는 참을 수 없이 세계를 갈망하지만 세계와 만날 수 없고, 참을 수 없이 소통을 갈망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지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히키코모리’의 문화적 원형일 뿐 아니라, ‘함께 있음의 고통’도 ‘혼자 있음의 고립감’도 견디지 못해 남몰래 신음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숨어 사는 ‘지하’는 단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의 ‘지하’다. 우리가 차마 내보이지 못하는 마음의 지하, 그것은 단지 분석과 치료를 기다리는 마음의 질병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순수한 원형이자 버릴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인간이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은 그가 숨김없이 토로하는 영혼의 지하감옥이 우리 자신의 ‘말할 수 없는 비밀들’과 소리없이 교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우리들 저마다의 마음에 숨겨진 ‘영혼의 지하실’을 일깨운다. 어제 참은 우리의 분노는, 오늘 겪은 우리의 절망은, 또 어떤 영혼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은밀한 부활을 꿈꾸는 것일까.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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