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학교 시절 나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논술’은 끔찍이 싫어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틀에 맞춰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글 속에서 ‘나다움’이 사라져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들이 피어올랐다. 나는 본문에서는 버려질 것이 빤한 잡생각들을 일일이 메모하며 ‘아, 이런 게 정말 나다운 것인데!’라며 홀로 안타까워했다.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난 다양한 곁가지 생각들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 자꾸만 본문 바깥, 생각의 갓길에서 한껏 노닥거리고 싶은 충동. 글쓰기뿐만 아니라 인간도, 인생도,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잡생각’이, 메인 테마를 벗어난 ‘잡음’ 같은 의외의 사건들이 우리 삶의 계획된 항로를 뒤엎곤 한다. 논리가 이끄는 대로만 충실히 글을 쓴다면 ‘문학’이 탄생할 수 없을 것이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이익’이나 ‘합리’를 향해서만 나아간다면 역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글쓰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외성과 불합리를 인간 사유의 근원적 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끊임없이 ‘논지에서 벗어난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무 이유 없이 변칙적으로 논지를 이탈한다. 바로 그 들쑥날쑥함과 셀 수 없는 오류들이 이 소설을 읽는 진정한 매력이며,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19세기 최고의 ‘지하 인간’의 결정적 본성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사유 자체에 내재된 모순과 분열, ‘계몽된 이성’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재단할 수 없는 예측 불능의 인간형을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아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려 20년 동안 그야말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으로부터 ‘잠수’를 해버린 은둔형 외톨이다.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오직 치열한 독백 같은 글쓰기뿐이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결코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 그런 인간이다”라는 소설의 첫 대목은 마치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주인공이 ‘그칠 줄 모르는 악의’라는 영혼의 불치병을 앓게 된 과정, 그리고 오직 ‘책’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고독한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닮은 음울하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주옥같은 문명비판의 목소리를 토해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9세기 중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러시아사회에 던지는 거대한 물음표였다. 합리적 이성과 물질문명의 진보에서 희망을 보던 계몽주의자들의 규범적 사유에 맞서, 도스토옙스키는 이성의 지하에 있는 인간, 계몽의 그늘에 있는 인간의 또다른 모습을 그려낸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다.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난 혼자인데 그들은 모두 닮았다!’는 생각 때문에 평생 괴로워한다. 혼자 있을 때조차 이 세상 모두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인간, 그러나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지하인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직 생각 속에서만 소통을 꿈꾸고, 생각 속에서만 세계를 바꾸고, 생각 속에서만 타인을 사랑한다. 그의 유일한 동무는 ‘책’뿐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마치 레고 조립을 하듯 손쉽게 세계를 창조하고 순식간에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몽상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접속’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 또한 바로 세계다. 그는 참을 수 없이 세계를 갈망하지만 세계와 만날 수 없고, 참을 수 없이 소통을 갈망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지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히키코모리’의 문화적 원형일 뿐 아니라, ‘함께 있음의 고통’도 ‘혼자 있음의 고립감’도 견디지 못해 남몰래 신음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숨어 사는 ‘지하’는 단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의 ‘지하’다. 우리가 차마 내보이지 못하는 마음의 지하, 그것은 단지 분석과 치료를 기다리는 마음의 질병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순수한 원형이자 버릴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인간이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은 그가 숨김없이 토로하는 영혼의 지하감옥이 우리 자신의 ‘말할 수 없는 비밀들’과 소리없이 교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우리들 저마다의 마음에 숨겨진 ‘영혼의 지하실’을 일깨운다. 어제 참은 우리의 분노는, 오늘 겪은 우리의 절망은, 또 어떤 영혼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은밀한 부활을 꿈꾸는 것일까.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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