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 - 난중일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척자점의 비밀
박종평 지음 / 이매진 / 2010년 12월
절판


이순신과 이일은 오랜 악연이다. 이순신이 42세에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발령받을 때 이일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였다. 함경도 지역은 최북단 접경 지역으로 여진족이 자주 침입했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 상관인 이일에게 수차례 병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고, 결국 여진족 추장 니탕개가 추수한 곡물을 탈취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녹둔도를 침입했다. 이때 이순신 수하의 병사가 죽고, 이순신 자신도 적의 화살에 왼편 다리를 맞았다.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물러 이순신을 처형하려 했다. 그때 이순신은 자신을 죽이려고 형틀을 준비해놓은 이일에게 "내가 역전 고투하여 적도들을 물리치고 우리 백성 6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는데 어찌 이를 패전이라 할 것이며, 또한 진작부터 군사들을 더 배치해달라고 몇 번이나 청한 공문서 초안이 내 수중에 있으니 조정에서도 죄가 결코 나에게 있지 않음을 곧 알게 될 것이오"라고 오히려 이일의 실책을 문제삼았다. 이일은 자신에게 유리한 보고를 꾸며 올렸고, 조정에서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순신에게 백의종군 명령을 내렸다. -170쪽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두 번 했는데, 첫 번째 백의종군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이일이다. 그렇게 악연을 맺은 인물인 이일이 이 시기에는 순변사로 윤두수와 함께 이순신을 계속 괴롭혔다.
-170-2쪽

오늘날 신랑이 '장가간다'는 의미에서는 사라진 한국 고유의 혼인 풍속을 말한다. 신랑이 처가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혼례 뒤에도 신부의 집에서 그대로 눌러 사는 '처가살이'를 말한다.
17세기 이후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혼인 풍속의 영향으로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가서 사는 시집살이로 바뀌어 오늘날 같은 결혼 문화가 형성되기 전의 풍속인 것이다. 임진왜란 전의 혼인 풍속을 기록한 유희촌의 <미암일기>에도 '장가를 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미암일기>를 보면, 신랑이 대례를 치르고 신부 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初行이라고 하며, 이때의 동행자는 신랑 집을 대표하는 부친으로 상객上客이라 한다. 미암의 경우에도 상객으로 아들 혼례에 따라갔다가 혼례를 치르고 그 다음 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219쪽

정탁의 <신구차> 중에서

인재는 무릇 나라의 보배이기 때문에 비록 통역관이나 주판질하는 사람일지라도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 일에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을 오직 법률에만 맡기고 조금도 용서하지 못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이순신)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23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