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둥글 지구촌 종교 이야기 함께 사는 세상 1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 지음, 임미오 옮김,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 그림 / 풀빛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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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다.
힘든 상황이 되면 대부분 신앙에 의지한다고 하는데 신을 숭배하는 과정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나 역시도 그들의 도덕적인 면을 본받고 싶고 도서를 통해 신앙의 교훈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힘들 때만 신에게 의지하는 진심없는 교리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나의 가치관을 확립하는데 이 도서가 큰 도움을 주어 기쁘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교 모두 이 세상에 평화를 뿌리내리고자 했던 신들을 모시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긴 종교임은 잘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때문에 인류가 복잡해진 종교 문제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근본을 바로잡아 흐름을 이해하게 만든 계기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힌두교는 자신들의 삶이 영원히 되풀이 되고, 과거의 삶이 누적되어 현재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힌두교인들이 신앙을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불행을 피해갈 수 없기에 영혼이 영원히 편한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끊없는 수행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들의 종교 문화가 더 자유로운 삶으로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길 원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운명에 순응하는 그들이 계급에 따라 누구는 기득권층이 되고 누구는 영원히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 잣대는 아쉬운 점이다.
종교적인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이해관계가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합리한 구조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힌두교는 다양한 신을 섬기는 종교인만큼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의 많은 신들이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아바타"의 유래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나의 신분을 대신하는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는데 영광의 인간의 몸을 빌려 신으로 세상에 나타나 세상을 신비롭게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를 답고있다고 하니 재미있기도 하고 예쁜 이름 같았다.

사실 불교는 인간의 삶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길 바라던 붓다의 시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싯타르타의 경지에 이르러 영원히 행복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였다.
게다가 모든 세속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연을 택한 사람이다. 붓다는 싯타르타 안에서 영원히 행복했다는데, 그가 말하는 진리는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방법에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중용을 아주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고 저마다의 깨달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나 역시도 욕심을 떨치고 행복의 조건에 만족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인 유대교는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파생 종교의 근본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신앙심이 부족해 종교의 모태에 익숙하지 않아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신앙의 이해와 배경지식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부침속에도 혹독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이겨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고통받았던 조상의 고통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유월적 의식에 무교병과 고추냉이를 먹는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이름 앞에 사랑의 증표를 몸소 실천하고 거룩한 과거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늘 접하던 종교 이야기와는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예수의 탄생을 다룬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는 큰 도움이였다. 하느님의 아들을 자칭한 예수님,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류를 구원한 그가 이루어 낸 기적에 예수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예수의 탄생 이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최대의 종교가 아닐까 싶은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에도 세상의 질서를 다시 세울 것을 증명해 보였다는 부분에 그의 자세만큼은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부활과 예수를 믿어 기적에 가까운 체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해를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유일한 신이 예수이고 그가 아닌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사는 동안 순탄치 않았지만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고 또 하나의 희생이 되어 종교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이슬람 교도의 삶은 알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이였다.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금식을 하고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인 알라를 받드는 과정은 스스로를 떳떳하게 만들고 부족한 것과 넘치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한다.
그 외에도 알라에게 몸을 굽혀 기도하고 옷 매무새 하나까지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 신기하지만 믿음의 위대한 힘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비춰졌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들의 율법이 여성에게는 압박의 상징이 된다는 점이다. 발전적인 가치를 가로막고 실정에 맞는 율법을 반영하지 않는 그들의 차별적인 종교적 의식은 안타까웠다.
또 하나, 이슬람교는 9.11 테러로 세계인에게 실망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슬람 교를 믿는 사람들이 절대적 권력에 대한 피해상황으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불신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비극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부 소수의 나름의 신을 섬기는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테러리스트들이 올바른 종교의 깨달음으로 이슬람교가 평화에 근본을 둔 종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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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행복한 청소부
모니카 페트 지음, 김경연 옮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 풀빛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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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미술 음악가 거리 표지판을 청소하는 아저씨, 유명 작가와 음악가들의 이름을 매주 대하고 깨끗히 하는 자신의 역할에 나름대로 굉장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있는 분이셨다. 그 분은 누가 뭐래도 자신의 직업에 애정을 느낄 줄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저씨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의 계기가 된 사건 하나... 그것은 글루퀴 거리를 청소하는 아저씨의 옆을 스치던 소녀가 글루퀴에 대해 모르고 던진 엉뚱한 질문이였다. 사실 아저씨께서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매일 대하기만 할 뿐 그 사람들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음을 깨달으셨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일에 좀 더 만족감을 얻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로 마음먹고 음악과 문학을 향한 배움의 열망을 키워가셨다!
아저씨는 말씀하셨다, 배움을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모든 것을 놓친 건 아닌 거라고...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흔히 늦었다고 생각될 때 가장 빠르다는 말들을 많이 하곤 하는데, 늦게나마 배움의 깨달음을 얻고 자기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를 쌓는 아저씨께서 배움으로부터 우러나오게 한 또다른 배움의 의미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생각한다.
사실 공부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단순히 미래에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인지 어른들에게는 학문의 의미가 더 쉽지 않은 상황인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용기있게 실천하는 아저씨의 모습에 박수를 쳐 드리고 싶다. 이렇게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깨달음을 얻고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아저씨가 존경스럽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음악하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을 굳이 구분짓는다. 그러나 아저씨께서는 순수한 목적으로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해 지식을 마주하며 만족을 얻으셨다.
늦게나마 배움의 재미에 푹 빠진 아저씨를 보며 나도 닮아가고 싶었다. 공부에 게으른 내게 일생의 의미를 두고 무엇을 위한 열망에 거대한 열매를 맺어야 하나 깊이 고민하게 된다.

도서에 등장하는 생각을 사랑하는 주인공 부루퉁 아저씨 역시 나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바쁜것을 모르고 사는 여유로운 노인처럼 보이는 부루퉁 아저씨는 알고보면 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부딪치고 수집해 정리를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역할을 하신다. 저마다의 생각들이 머리속에 자리잡아
가는 이유도 아저씨 덕분이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부셔져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까지 아저씨의 손길은 절대적이였다. 선반위에 수 많은 생각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나름의 원칙에 따라 생각의 정리를 하고, 다시 달콤한 향기를 퍼뜨려 꽃 피울 때 까지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해 주신다.
요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같은 생각을 되풀이 하다가도 곧 잊어버리고, 머리속에 입력된 수 많은 생각들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내 머릿속을 떠난 듯 한 착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반면 생각이 머리속에 너무 꽉 들어차 있어서 머리안에서 퍼지지 못해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붙잡아 내 머리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부루퉁 아저씨가 어딘가 존재할거란 생각이 든다. 그 때마다 어디선가 아저씨께서 머리속에 꿈을 꾸는 방법을 되찾게 하고 새로운 생각이 자리잡을 때 까지 가장 아름다운 생각의 소리가 퍼지도록 해 주셨으면 좋겠다.

큰 도시에 살고있는 늙은 화가 아저씨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세월의 흐름속에 바다를 영원히 품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아저씨처럼 바다를 동경한 기억에 아저씨의 바다여행에 의미있는 풍경이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아저씨께서는 나이만큼 모든 풍경을 빠짐없이 그릴 법 한데, 나이가 지나도 유일하게 그림으로 남기지 못한 풍경 하나가 있다. 바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
사람들은 아저씨에게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아저씨께서는 끝없는 바다의 매력을 상상하곤 하셨다.
아저씨에게 바다여행은 어려움이였다. 도시의 부족한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고 해도 평생 바다에서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였기 ‹š문이다. 바다를 찾으려 지출할 금액을 만드는 데에도 살만한 도시생활을 거의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었고,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였으니...
그러나 아저씨는 여행의 참된 의미를 맞이하셨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바다를 그리워했고, 자연스럽게 바다의 움직임을 따라 그렸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셨다.
끝내는 평생 바다를 그린 그 순간에 멈추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도시로 돌아오고 나서도 바다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진심으로 바라던 풍경에 머물러 계셨다.
아저씨의 소원은 어쩌면 막연한 소원으로 머물지 몰랐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여행지에 대한 매력으로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지 못한 풍경들까지도 모두 기억할만큼 아저씨는 바다의 풍부한 매력을 모두 체험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온통 바다뿐이셨다. 처음 접하는 곳에서 평생을 두고 느끼지 못할 애정을 느꼈고,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원했던 무엇인가를 두 손에 꼭 쥐고 의미가 깊어질 때를 기다린 아저씨께...
나는 새로운 열망이 생겼다. 나 역시도 아저씨를 닮아보고 싶다. 목적지로 가는 꿈에 부풀어 새로운 것을 성취할 준비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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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달 나무 이야기 - 열두 달 자연 이야기 2-자연의 아이들
이름가르트 루흐트 지음, 김경연 옮김, 이은주 감수 / 풀빛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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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나무를 보면 늘 벌거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파리 하나 없이도 진갈색의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나무는 아직 짙은 푸른빛을 띤 채 촘촘하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늘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띄엄 띄엄 보던 나무들을 일렬로 세워보니 나무의 특징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열두 달 나무 이야기"는 이러한 도서이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 그러나 늘 보면서도 공통점과 차이점을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다양한 나무들이 함께 있다.

나도 이전엔 그저 나무는 늘 키가 크고 줄기의 표면은 두툴두툴 하지만 매끄럽게 쭉 뻗은 식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나무마다 열매로부터 퍼진 씨앗이 퍼지며 작은 묘목이 커 나가고 각각의 나무가 저마다 독특한 모양을 지니고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는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자세하고 다양한 나무에 재미를 지금껏 몰랐다는 게 아쉬웠다. 이처럼 나무에 다양하고 자세한 정보를 쉽고도 재미있게 설명한 도서가 또 있을까?

나무의 일기처럼 직접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나무의 생활기, 1년동안 지면 위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삽화는 자연의 신비를 들려주고 있었다. 새순이 자라나 돋아나면서 통통하게 물이 올라 노랗고 새파랗게 빛나는 새순부터 봉오리까지 모든 것이 두 눈을 사로잡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전에 바람이 많이 불 땐 바람이 들판의 흙을 데려간다는 멋드러진 표현은 시의 한 구절 처럼 들린다. 낭만적인 그림이 먼저 떠오르고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지식까지 함께 할 수 있어 나무이야기의 감동을 더하고 있다.

나무들이 잎과 봉우리를 틔우고 나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작은 열매둘이 점점 커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어린 싹이 점차 부풀어 올라 자라는 모습이 마치 팝콘을 만드는 모습 같았다.
금방이라도 향내음이 날 것 같은 푸르른 숲 사이마다 윤기가 흐르는 나뭇잎들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올 무렵엔 저마다의 제 2의 색을 내며 흩날리며 여러가지 색깔로 빛나고 있다.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 폭의 명화 같기도 하고 자연의 모습 그대로 인 듯도 하다.

길을 지나가다 의심의 여지 없이 보던 풍경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나무들을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노란빛과 연두빛으로 밝게 빛날 나무들이 봄을 간직한 듯 저마다의 독특한 매력을 구체화 하고 있을 땐 나무들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짙어지고, 두터워지는 나무들이 자랄수록 나무 스스로를 그리고 지구 전체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곤충들과 둥지를 트는 새들과 나무 곳곳에서 터전을 마련하는 사람들, 늘 푸른 나무를 보고 기뻐하는 이들, 게다가 오늘 날에는 다양한 땔감과 건축 재료가 되어 나무는 기쁨을 준다. 모두 늘 나무와 함께 하고 있고 모두들 나무의 성장 과정을 닮아가며 산다.

그러나 나무는 무럭 무럭 자라지 못하고 한 켠엔 병들어 가고 있는 요즘 나무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숲은 고통을 숨긴 채 아파하고만 있으니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나무가 상처받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 때문인데... 나무를 구별없이 베어가는 통에 산사태로 무너지고, 해로운 물질로 잎이 바래는 나무들, 많은 세월을 함께하면서도 이제야 나무의 아픔을 깨달아 마음이 아팠다.

나무는 늘 인간에게 고마운 존재이고, 여전히 숲은 아름답다. 나무는 한해가 저물수록 더 단단해지고 굳건해지고, 늘 새로운 탄생을 예고한다. 나무는 그늘이 되고 힘들 땐 휴식이 되어 주고 열매가 퍼지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도 새 희망을 불어넣는다. 어떤 것도 나무를 대신할 수 없을텐데 지금처럼 나무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기특한 나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보았다. 오늘도 어디에 어떤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지 눈 크게 뜨고 찾아보며 내 주위에 어떤 나무가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느라 바쁘다. 나에겐 새로운 나무의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나만의 나무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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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달 숲 이야기 - 열두 달 자연 이야기 1-자연의 아이들
이름가르트 루흐트 지음, 김경연 옮김, 이은주 감수 / 풀빛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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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은 숲과 늘 가까이 할 수 있을 시간이 많았다. 여름방학이 되면 동네 뒷 산으로 올라가 숲을 찾아가 잠자리를 잡아 방학 숙제로 곤충채집을 해 갔었고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따 먹고 소풍으로도 자주 갔던 곳이였다. 평소에도 숲 속 깊숙히 들어가서 지저귀는 새들과 동물들을 자주 만나곤 했었는데 이제는 특별히 그럴 기회가 많이 없는 것 같다. 가끔 운동삼아 숲으로 등산을 가기도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아 빈 터뿐인 숲과 어쩌다 내려앉은 이끼를 본 것이 내가 요즘 기억하는 숲의 모습이다...

나는 오늘 내 기억 속 거대한 숲의 모습을 간직한 숲 속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았다. 그 때 봤던 숲 속 친구들은 그 모습 그대로 인 것만 같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숲의 신비를 직접 들여다 보는 느낌이였다. 아직도 내겐 숲에서 일어난 장면들이 생생하고 상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내게 이런 기회를 준 도서는 "열두 달 숲 이야기" 였다. 그런 의미에서 숲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모습들과 숲의 신비속에 감춰진 법칙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놀라왔다. 숲의 12달 변화 과정은 그동안 숲에 대해 궁금하거나 보고싶었던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마치 숲에 대해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숲속 깊숙히 사는 어느 친절한 마술사가 풀어내는 듯한 대화를 듣는 기분 좋은 느낌으로 도서를 끝까지 읽었다. 게다가 그의 표현력은 더 없이 놀라웠다. 실사과 같은 일러스트, 대화같은 설명들은 실제 숲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직접 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되어 내 마음의 울림을 전해 주었다.

숲의 계절 변화는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흔히 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과서도 이처럼 숲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예시나 풍부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교과서에서 보던 딱딱한 설명과 애매모호하게 그려넣은 삽화의 차원을 넘어선 실사와 같은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다.  과학잡지나 자연의 신비를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생생한 장면을 포착해 낸 것 같은 사실적인 그림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아름다운 숲 속 세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눈 덮힌 산 속에서 겨우내 양식을 묻어둔 땅을 찾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해메며 땅속을 파헤치는 초롱초롱한 눈빛의 다람쥐와 건조한 나무껍질을 부리로 애써 파내는 딱따구리의 모습들은 숲에 남긴 그들의 자국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설명까지 곁들여 있어 숲의 상황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아주 작은 벌레가 잎맥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들도 무척 세심하게 그려넣어져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생명체이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보면서 모든것들이 숲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김없이 특별히 생각 해 볼만한 환경 문제도 다루고 있었다. 요즘 숲의 파괴를 걱정하는 시점인만큼 숲의 이야기는 숲의 가치 또한 새롭게 조명했다. 숲의 밤과 병든 나무들의 모습은 숲의 고마움은 모르고 욕심만 채우려 했던 인간의 이기심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있었다. 우리 눈에 띄지 않는 숲의 모습도 다시 보게 했다.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듯한 어둠이 깔린 숲에 낮동안 숨어 있었던 동물들이 서로 엉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였다. 모든 모습들은 자연도 인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이고, 우리도 숲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늘 주기만 하고 한없이 베풀기만 하는 나무들인데 인간은 욕심때문에 숲을 망가뜨리고 시들어 가게 하는 건지... 숲의 소중함을 깨닫고 나서야 반성해보며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숲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이제라도 우리가 숲을 돌볼 과제를 띄고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수풀 속에 햇살이 비치면 그 틈새를 비집고 우듬지에서부터 이끼가 있는 밑바닥까지 태양에너지가 주는 영양분을 보충하며 서로 자기의 위치를 활용하며 지내는 모습, 스스로 숲을 관리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숲의 모습을 보며 무척 감동을 받았다. 흙 아래로 튼튼하게 뿌리내린 믿음직스러운 큰 나무, 그 뿌리가 나무 밑기둥부터 잎사귀까지 수분과 양분공급을 위해 쉼없이 움직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숲의 숨은 이야기들... 이제 우리 인간들도 나무 뿌리와 같은 강하고 튼튼한 지지대처럼 숲에게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숲은 내게 서로 돕고 도움받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어린이들도 숲의 유익한 점은 본받고 숲을 좀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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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풀빛 그림 아이 1
로드 클레멘트 글.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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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 하루도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하루도 쉴 틈 없이 바빴을 것이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매일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일과 중 매일이 반복의 연속이기만 했을까?
특별한 꿈을 꾸기 위해는 잠시 쉬어가야 한다는 말, 그러나 하루도 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행여나 놀더라도 하루만 휴가를 보내며 그 휴가의 날만 상상과 기대로 가득 품을 생각만 하는 사람들.
그러나 궂이 놀러가거나 휴가를 가지 않더라도 매일이 특별해 질 수는 있다! 내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독특한 발상이 곁들여진 오늘 하루의 일기를 쓴다면 오늘 일어난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가 특별해지고 신나는 기억을 품은 휴가지에서 보낸 기억보다 몇배로 값진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정말 사소한 풍경이 눈 앞에서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 처럼 떠오르기를 희망한다면 꼭 "오늘의 일기"가 주는 감동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볼 것을 추천한다.

아직도 나에게 누군가 오늘 일과를 말하라 주문한다면, 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오늘의 일기"를 알기 전 그때는 나의 일과에 대해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기록할 만한 일기를 남긴다는 것은 아직도 어렵지만 나의 밋밋하고 지겨운 일상은 더는 없음을 오늘 나만의 주인공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지겨운 일상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판타지 영화에서나 본 듯한 쌩뚱맞은 그림을 그려넣은 아이, 그러나 그 멋드러진 그림은 주인공이 가진 위대한 상상력의 결실이였음을... 그렇게 "오늘의 일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로운 일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공의 오늘의 아침식사는 너무나 밋밋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삶은계란과 토스트 뿐이였다. 그러나 오늘의 일기에는 축구공보다 더 큰 계란을 그려넣었다. 너무 커서 접시만한 유리컵에 계란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늘 그렇듯 평소에 먹는 아침식사처럼 맛은 없었는지 주인공의 표정은 뾰루퉁한 모습이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토록 큰 계란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모습이, 그래서 지나치게 밋밋한 우리의 일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아침 뿐만은 아니다. 주인공의 식사는 너무도 특별하다. 매일 먹는 식사에서 특별한 맛을 찾게할 때가 자주 있었을까 싶었지만 역시 주인공은 풍부한 상상력이 남달랐다. 지나치게 매운 음식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탕 마크를 찍어 놓고, 점심에 먹은 학교 급식이 너무 맛있었다며 식탁 위에 호텔에서나 맛볼 화려한 만찬을 올려놓았다. 무엇보다 놀란 건 남다를 것 없는 식사조차 풍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는 것, 누가봐도 그 날의 일과는 아주 특별했음을 짐작하게 했던 무한한 상상의 표현력이였다.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할머니의 차가 그날따라 느린 이유는 할머니의 차가 고물차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날의 운전기사인 이웃집 할머니가 공룡만큼 뚱뚱했기 때문이였다는 주인공, 누군가는 발칙하다 했겠지만 아마 뚱뚱한 할머니가 이 일기를 봤더라면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주인공의 재치있는 표현에 사랑스러움을 느끼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지나치지 않는 아낌없는 칭찬을 보낼 법 하다.

나는 오늘을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주인공의 눈으로 참신한 생각이 가득한 일상이 되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일기에 이러한 표현이 들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물론 익숙하지 않은 표현에 연습이 필요하고 일상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도 새롭게 해야겠지만 나도 주인공과 같은 일상이 여러번 겹쳤으니 주인공의 표현에 나만의 상상을 덫붙여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기가 되고싶다.
주인공은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어느때처럼 온천보다 더 넓은 욕조에 엄마와 함께 목욕을 했다는데 오늘 저녁엔 주인공이 뒤집어 쓴 먼지투성이의 와이셔츠를 세탁기에 넣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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