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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둥글 지구촌 종교 이야기 ㅣ 함께 사는 세상 1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 지음, 임미오 옮김,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 그림 / 풀빛 / 2007년 2월
평점 :
솔직히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다.
힘든 상황이 되면 대부분 신앙에 의지한다고 하는데 신을 숭배하는 과정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나 역시도 그들의 도덕적인 면을 본받고 싶고 도서를 통해 신앙의 교훈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힘들 때만 신에게 의지하는 진심없는 교리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나의 가치관을 확립하는데 이 도서가 큰 도움을 주어 기쁘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교 모두 이 세상에 평화를 뿌리내리고자 했던 신들을 모시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담긴 종교임은 잘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갔고 때문에 인류가 복잡해진 종교 문제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근본을 바로잡아 흐름을 이해하게 만든 계기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힌두교는 자신들의 삶이 영원히 되풀이 되고, 과거의 삶이 누적되어 현재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힌두교인들이 신앙을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불행을 피해갈 수 없기에 영혼이 영원히 편한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끊없는 수행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들의 종교 문화가 더 자유로운 삶으로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길 원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운명에 순응하는 그들이 계급에 따라 누구는 기득권층이 되고 누구는 영원히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 잣대는 아쉬운 점이다.
종교적인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이해관계가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합리한 구조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힌두교는 다양한 신을 섬기는 종교인만큼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의 많은 신들이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아바타"의 유래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나의 신분을 대신하는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는데 영광의 인간의 몸을 빌려 신으로 세상에 나타나 세상을 신비롭게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를 답고있다고 하니 재미있기도 하고 예쁜 이름 같았다.
사실 불교는 인간의 삶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길 바라던 붓다의 시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싯타르타의 경지에 이르러 영원히 행복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였다.
게다가 모든 세속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스스로 자연을 택한 사람이다. 붓다는 싯타르타 안에서 영원히 행복했다는데, 그가 말하는 진리는 편안한 상태에 이르는 방법에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중용을 아주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고 저마다의 깨달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으로 나 역시도 욕심을 떨치고 행복의 조건에 만족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인 유대교는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파생 종교의 근본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신앙심이 부족해 종교의 모태에 익숙하지 않아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신앙의 이해와 배경지식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부침속에도 혹독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이겨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고통받았던 조상의 고통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유월적 의식에 무교병과 고추냉이를 먹는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이름 앞에 사랑의 증표를 몸소 실천하고 거룩한 과거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늘 접하던 종교 이야기와는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예수의 탄생을 다룬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는 큰 도움이였다. 하느님의 아들을 자칭한 예수님,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류를 구원한 그가 이루어 낸 기적에 예수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예수의 탄생 이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보면 정말 최대의 종교가 아닐까 싶은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에도 세상의 질서를 다시 세울 것을 증명해 보였다는 부분에 그의 자세만큼은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부활과 예수를 믿어 기적에 가까운 체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해를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유일한 신이 예수이고 그가 아닌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사는 동안 순탄치 않았지만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고 또 하나의 희생이 되어 종교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이슬람 교도의 삶은 알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이였다.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금식을 하고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인 알라를 받드는 과정은 스스로를 떳떳하게 만들고 부족한 것과 넘치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한다.
그 외에도 알라에게 몸을 굽혀 기도하고 옷 매무새 하나까지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 신기하지만 믿음의 위대한 힘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비춰졌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들의 율법이 여성에게는 압박의 상징이 된다는 점이다. 발전적인 가치를 가로막고 실정에 맞는 율법을 반영하지 않는 그들의 차별적인 종교적 의식은 안타까웠다.
또 하나, 이슬람교는 9.11 테러로 세계인에게 실망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슬람 교를 믿는 사람들이 절대적 권력에 대한 피해상황으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불신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비극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부 소수의 나름의 신을 섬기는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테러리스트들이 올바른 종교의 깨달음으로 이슬람교가 평화에 근본을 둔 종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