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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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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초겨울, 아마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을 겁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였어요. 그들은 "한국어로 쓴다는 자각"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작가가 아닌 입장이라 그 자각을 오롯이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독자로서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더랬습니다. 아마 몇 번의 실망과 냉담을 거쳐 그럼에도 다시 또 한국소설을 집어들게 되는 이유와도 비슷하겠지요. 동시대를 사는 작가와 독자, 그 사이에만 유효한 긴장과 공감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 부지런히 읽는 작가들은 그와 같은 이유로 냉담하지 않고 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강명 작가를 이야기하느라 이렇게까지 갔네요.

처음 <표백>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의구심을 가졌었습니다. 친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표백>에 관한 감상을 '허무하고, 얇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요. 그러니까 어떤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고, 그가 말하는 '자살', '표백세대'라는 표현에 강렬한 인상을 받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꽤나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작가의 언어와 인물 간의 대화 등 모든 것이 그랬어요. 만일 <표백>의 주제의식에 비해 제가 이 작품을 다소 '허무하고, 얇다'고 느꼈다면 그런 낯설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최근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다른' 스타일을 말하기도 했는데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낯선 느낌은 틀린 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겠다, 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긴 문학에 틀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 시절 저는 교만한 독자였겠지요. 그리고 지금, 장강명이 많이 읽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하는 심정을 가졌어요.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로 이어지는 장강명 읽기의 과정입니다.

 

이제 <댓글부대> 이야기를 할까요.

하루, 또는 반나절, 방 한 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일찍부터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 훨씬 노후하다는 말들. 얼마 전 그런 말들을 듣고,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문학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이런 의견 역시 교만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독자의 욕구라고 해두자고요. 바로 그 점을 상기한다면 장강명은 확실히 다른 만족을 줍니다. 특히 <댓글부대>에서 견지하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진단이라는 것은 확실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선과 악, 흑과 백, 내 편과 네 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문제는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 존재 하나만 해도 그토록 다층적인데, 그 다층의 인간이 다층으로 모인 사회를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수면 밖으로 드러난 문제 역시 다양한 차원에서 진단해내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데요. 이것은 이 사회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닙니까. <댓글부대>에서 다루는 사회 현상에 대한 진단, 참 새롭잖아요? 이런 걸 소설로 읽어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참, 아득해집니다.

 

가령 이런 것들.

 

강사가 자기들의 언어를 썼기 때문이죠. 여기 강사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사람도 기껏해야 삼십 대 중반인 거 눈치채셨습니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건 일단 불신하고 보는 세대입니다. 인터넷에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판쳐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준다 싶은 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아이들이에요.(24쪽)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 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박,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55쪽)

 

(과문한 탓에, 이미 여러 방면에서 나온 진단들을 뒤늦게 소설에서야 발견했을 수도 있겠죠. 다시 교만이란 녀석 한 번 더 털고 갑니다...)

 

실체가 드러났든 감춰져 있든, 사실이든 음모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상상이 시작된 곳은 현실이었고, 작가가 실현한 풍경 안에도 현실은 아주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이것이 <댓글부대>의 성취가 아닐까요.

 

무엇보다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왕중의 왕, 끝판왕, 이 사회를 조직하는 큰손, 시들어가는 그 노인이 '괴벨스'를 인용하는 장면은 단연 좋습니다. 그 엄청난 존재가 침을 흘리는 모습, 어리고 젊은 여자를 탐하는 모습과 함께 기껏 인용하는 것이 괴벨스라는 점은 작가의 복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그런 존재에게 좌지우지 당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병든 존재들에 대해서도, 아프게 생각합니다.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고. 우리는 전쟁 중이었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고 있었어.(147쪽) 

 

먼 미래도, 다른 공간도, 특별한 사람도 아닌 바로 이곳, 여기, 이 사람들의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이 좋습니다. 비극적인 결말도 좋고요. 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점도 좋습니다. 반나절에 후다닥 읽어버리고 만 이 작품을 지금은 열심히 주변에 추천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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