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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집 앞에 공터가 있어요. 어느 날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어린 친구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뭔가 놀이 같은 것을 하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창문을 꼭 닫아두었는데도 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뉴스는 연일 더 중요한 이야기들을 부러 빼두고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 따위에 대해서만 떠드는 중이었죠. 그에 따라 저는 저 친구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춥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제 엉덩이가 다 차가워지는 걸 느꼈습니다. 손톱은 벌써 파래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은 아마 저보다 춥지는 않았을 겁니다. 발랄한 색감의 겉옷을 입고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비록 저들의 뒷모습만 창틀 사이로 얼핏 보았지만 말이에요. 그런 짐작들과 상상으로 혼란스러운 중에 창 안에, 담요를 덮고, 방금 만들어 낸 커피가 담긴 약간 뜨거운 듯한 잔을 감싸고 있으면서도 저는 잃어버린 기억이 문득 떠올라 으스스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선명하진 않고, 그저 잠깐 떠오르는 것 같은 기억들 때문이었습니다. 거기 있나요? 묻고 싶어졌습니다. 거기 있나요? 어떤 답도 돌아오지는 않고, 기억들이 채 제 모습을 내보여주기도 전에 다시 잃어버리는 듯해서 저는 정말이지 낭패감이 들었어요. 그랬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사랑스런 어린 친구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서늘한 세계에서 나만, 오직 나만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외딴 세계, 나 혼자서 끝없는 길을-알고 보면 금방 제 자리로 돌아오는 섬 둘레를- 계속해서 걸어야만 하는 곳이겠지요. 이것이 어째서 외로운 짓인지 몰라도 되었던, 어린 친구들을 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세계는 그들을 보기 전과는 닿을 도리 없이 달라져 있으니까요. 늘 곁에 있었던 것 같은 어떤 사람은 존재 여부 조차 확실하지가 않고, 곧 파묻힌 거인이 깨어나면 어린 친구들이 저를 서늘하고 외롭게 한 것처럼 사람들은 슬프고 화가 나는 기억들을 떠올리며 살육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거인이 어째서 파묻혔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서러움에만 집중하며 타인의 서러움을 탓하고 싸우려는 것이겠죠. 이런 짐작 때문에 책을 덮고 난 저는 여전하고 터무니없이 슬퍼만집니다. 공주와 액슬이라고 서로를 부르던 노부부가 걱정이 돼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작가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저는 더욱 외롭습니다. 먼 기억 속에서 오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던 그 허망한 약속을 떠올립니다. 이 약속의 정체도 용의 입김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한 가지 약속해줘요.
-무슨 부탁이에요, 액슬?
-단순한 거예요, 공주. 케리그가 정말로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안개 속에서 깨어나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결국 서로를 멀리하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오? 약속할 거죠, 공주? 안개가 사라지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액슬.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그 말을 들으니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어요, 공주.(383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