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누운 밤 창비세계문학 39
훌리오 코르타사르 지음, 박병규 옮김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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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어느 어두침침한 오후에 드러누워 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알 수 없는 곳, 낯선 산장에 떨어진 주인공이 악몽 같은 순간을 보내는데 어떤 경계를 지나면 다시 산장에 떨어진 처음 순간으로 되돌아갑니다. 되돌려진 시간은 다시 시작된 순간순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 앞서 했던 별 의미 없는 행위는 곧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습니다. 무의미한 것 같아 보이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반복과 환상에 저는 두통을 느꼈었습니다. 만약 그보다 먼저 이 작가, 훌리오 꼬르따사르를 만났다면 혼란이 좀 덜했을까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처럼, 규칙이 있는 것 같기도 혹은 완전히 불규칙한 것 같기도 한 작품들이 몰려옵니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와 타자가 끝없이 교차되는 이야기이자 나와 타자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이야기입니다. 정제되고 잘 짜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저는 혼란과 몰이해가 이토록 매력적일 수 있으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정말 경이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네요. 


만일 누군가에게 "좋은 건 알았어. 그래서, 대강 무슨 줄거리야?"라고 질문 받는다면 분명 쉽게 답하지 못할 겁니다. 사진 속 인물들이 이야기를 하고(<악마의 침>), 짐승이 화자로 변모(혹은 그 반대)하는(<아숄로뜰>) 이야기, 소설을 읽던 주인공이 어느 새 소설의 일부가 되는 이야기(<맞물린 공원>)들이니까요. 이 시점에서 띠지에 실린 문장,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는."을 읽어보게 됩니다(뒤에 언급할 <키클라데스 제도의 우상>의 한 구절입니다). 민망하긴 하지만 바로 이 문장이 소설을 접한 제 느낌과 무척 흡사하네요. 

그 중에서도 역시 <맞물린 공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압도적으로 짧습니다. 이렇게 짧은 단편을 읽어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단 두 쪽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니요.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한쪽에 곁눈으로 보이는 커다란 공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짧단 말이냐? 하지만 소설이 끝나면 이해하게 됩니다. 이 두 쪽 안에 완벽하게 순환하는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소설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한줄 한줄 읽어감에 따라 주변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야릇한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69쪽, <맞물린 공원>)"는데 과연 제가 그랬습니다. 작가는 이 문장을 쓰면서 그런 희열을 맛보는 독자가 자신의 탄생 100년이 되는 시점,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여기 한국에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앞서 '나와 타자가 끝없이 교차되는 이야기이자 나와 타자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이야기'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키클라데스 제도의 우상>을 들어 설명하고 싶습니다. 저는 작가가 이 단편으로 본인이 지향하는 작품세계를 설명한 게 아닐까 하고까지 생각하는데요. 


소모사의 이야기로는 시공간을 철폐하는 방법은 상황과 동작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집요하게 접근하다보면 언젠가는 초기 조각상과 자신이 동일해질 것인데, 이것은 중첩과 같은 이중성이 아니라 원초적인 접촉, 즉 합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79쪽, <키클라데스 제도의 우상> 
우연히 어느 섬에서 발견한 유물과 두 친구의 이야기예요. 모랑은 유물을 발견한 이후 소모사의 변화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소모사는 유물을 통해 자신이 과거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고요. 끝내 모랑의 피를 바쳐 과거와 접촉하려고 합니다. '원초적인 접촉, 즉 합일'을 기원하는 것일 테죠.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진짜 이야기는 소모사의 실패와 함께 시작됩니다. 소모사의 광기가 그대로 모랑에게 옮겨간 듯 모랑은 도끼를 쥐고 문 뒤에 숨어 도끼날을 핥습니다. 이제 모랑이냐 소모사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집요한 광기와 피만 남았고 이야기는 끝나니까요.  


이야기가 지나치게 불친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하고 더욱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무수히 많은 상징과 비유가 오히려 독자를 자유롭게 만들어줘요. 소설을 읽는 시간, 장소,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야기가 될 겁니다. 백 명이 읽으면 백 가지 이야기로 기억되겠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주변과 나누고 싶어지나 봅니다. 


마침 크리스마스에 환상적인 세상에서 신나게 놀다오니 드물게 즐겁습니다. 아마 두고두고 들춰볼 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습관이 된 것입니다. 앙드레, 습관이란 리듬이 구체화된 형식입니다. 리듬이 우리 삶을 도와주고 받는 요금입니다. -24~25쪽, <빠리의 아가씨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아숄로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조용한 모습에 반했다. 무심한 부동성으로 시간과 공간을 철폐하려는 아숄로뜰의 은밀한 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92쪽, <아숄로뜰>


나는 보는 것이 무언지 안다. 내가 무언가를 안다면 말이다. 보는 것은 거짓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무작정 내던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46쪽, <악마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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