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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녀 ㅣ 창비세계문학 37
쿠라하시 유미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4년 10월
평점 :
책에 수록된 연표를 보면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196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입니다. 그 시간을 생각해봅니다. 반세기의 간극을 말이지요. 그 시간 동안 십대였던 부모님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고요, 우주 어딘가에서 먼지처럼 휘날리던 우리들은 태어나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다시 책을 들여다봅니다. 이 작품은 어쩌면 그 시간에 있는 것도 같아요. 일본의 전후(戰後) 사회 분위기가 군데군데 엿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도통 그 시간에 출간됐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
그곳엔 저 '포도색 바다'도 없고 '아침마다 장밋빛 손가락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에오스'도 없는 대신, 거리 전체가 파찐꼬의 파도 소리와 두 다리로 헤엄쳐 다니는 너저분한 물고기 떼로 가득 찬 외설스러운 바다였다. - 198쪽
이토록 시각적이라니요! 그러니까 <성소녀>는 말하자면 '감각적인'이란 수식어가 꼭 어울리는 소설입니다. 이 외에도 에스프레소라든지 달리, 호텔 수영장 같은 언어 역시 50년 이라는 시간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50년 전'이라는 시간에 대한 제 편견이 지나쳤던 걸까요?). 작품에 깔린 정서 역시 흔히 상상했던 50년 전, 먼지가 폴폴 나고 물질적 빈곤함과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어떤 요즘 소설보다 감각적이고 몽환적이죠.
이 작품을 좋아할 지인들이 몇몇 떠올랐습니다. 이제 막 책을 읽기 시작한 사촌동생도(물론 여자) 포함되어 있어요. <성소녀>는 십대 후반 또는 이십대 초반의 여자가 읽기에 아주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습니다. 동성애를 암시하는 가장 친한 여자친구, 대개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는 쿨한 엄마, 손 뻗을 거리에 대기하고 있는 남자, 또는 자신을 애태우는 멋진 중년 남자, 거기에 경제적 풍요로움도 포함하고요. 기괴한 풍경의 카페와 모조 미술 작품들은 보너스입니다. 그리고 근친상간(이에 대해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합니다).
근친상간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쉽지 않겠지만 사실 저는 굳이 저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성소녀>를 즐길 수 있는 요소는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문장.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을 꼽을 수 있겠네요.
내 입은 나쁜 피 같은 수치와 암흑을 이야기하려 했건만 나오는 말들은 여름 햇볕을 만난 꿀처럼 투명해지고, 그것은 불행한 모험의 뜨거운 노래가 된다. - 101~102쪽
M씨에 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M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M씨는 지금 존재하면서, 내가 M이야, 하고 말합니다. 소름끼치고 무서워져버려요. - 80쪽
공간과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당장 이해할 수 있는 '내 일'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가 탁월한 문장 덕분이 아닐까요. 작가는 <성소녀>의 세계에 유감없이 독자를 초대하는데 그 초대장에 적힌 문구들이 참 매력적입니다. 그게 소설의 묘미지요.
문장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도 무척 탄탄한데요. 미키의 일기인 줄 알았지만 소설로 밝혀지는(과연 소설일지?) 앞부분과 K(주인공)의 소설로 진행되는 뒷부분이 흐름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균형을 이룹니다. 두 이야기의 경계에 숨어 있는 상징이나 복선들도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요.
미키에게 수많은 언어를 붙여 독자 앞으로 끌어내려는 소설가에게 저주 있으라. - 8쪽
인간은 도약하지 못할 때 쓰는 것이리라. - 140쪽
등장인물들도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느낌입니다. 미키의 친구인 M, K의 하숙집에 하숙했던 '작가', K의 친구들('에스키모', '후작'), 파파, K의 누이 L까지. 누구 하나 다른 곳에 기대지 않고 모두 꼿꼿하게 두 발로 서있는 느낌이랄까요(저는 늘 이런 작품(드라마나 영화 역시)에 열광하는데, 그건 성의 없이 등장하는 배경인물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겁니다). 특히 미키와 그의 파파가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에는 K와 L의 관계가 대응하고 있고요, '작가'와 K가 언젠가 여행지에서 맺었던 식물성의 관계는 K가 마침내 미키 안으로 숨기로 작정하던 때 맺은 것과 정확히 대응합니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꽤 멋진 소설에 들어가지 않나요?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면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이나 <내 남자> 같은 소설을 같이 읽어도 괜찮겠네요. 우리와 닮은 듯 다른 듯 묘한 정서를 가진 일본 여작가들의 소설을 읽기에 좋은 계절이니까요.
*창비 출판사에서 책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랑 어느 쪽이 더 악당인지 겨루어봐야만 합니다. ; 29
가난이란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질이 나쁜 악이어서 이건 결핍이라든가 부족이라든가, 혹은 불평등이라는 것과는 다른, 다시 말해, 뭔가 모자라는 것을 더하기만 하면 회복될 수 있는 그런 결함이 아니지. 존재 그 자체의 비열함이라는 거죠. ; 74
이때 알아챘는데 나의 감정은 어느새 충실한 개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 77
그건 아마, 인간이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나쁜 짓인 거겠죠. 이해하기 어려운 금지가 곧 규정인 것이고, 그렇게 금지되어 있는 것이 악이라고 이름 붙는 거겠죠? ; 132
자진해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성녀가 되는 길인지도 몰라요. ; 135
이 강력한 안정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하면, 명백히 도덕적 감각의 결여이다. ; 162
(...) 약혼한다. 이미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을 기다란 곰방대로 아편처럼 전부 빨아들인 자들끼리. ;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