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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어떤 소설이나 영화, 음악과 미술에 감명 받고 그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간직하게 되는 이유는 그 안에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예술은 그 안에 '개인'의 삶과 정서를 녹이는데 그것이 '세계'의 삶과 정서와 연결이 되지요. 아주 매끄럽고 놀랍게 말입니다. 그리하여 시간이나 공간마저 무색하게 만든 다음 예술이라는 경지에 이름을 새깁니다.
독특하고 비범해서 그저 낯선 작품들이 예술이라는 범주에 굳게 자리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작품을 왜 좋아할까요. 그 불편하고 어색한, 피하고 싶은 이야기(혹은 음악, 미술, 영화 등등...)가 가진 힘은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인간, 삶의 보편성 때문일 겁니다.
보편성. 그것이 제가 <미국의 목가>를 읽으며 말하고 싶었던 핵심 단어입니다.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동네는 '이방인'들의 집단입니다. '자유'로 상징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그대로 잇고자하는 그러나(혹은 그렇기 때문에) 결코 완벽하게 미국인은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인공 '스위드'는 그 동네에서 가장 '미국인다운', '미국인에 가까운' 영웅적 인물입니다. 훌륭한 외모와 뛰어난 운동 신경, 무엇보다 스위드의 인생에 원인인지 결과인지 알 수 없게 작용한(!) 그의 모든 방식, 모든 것에 대한 순응적이고 모범적인, '착한(nice)' 태도. 그것이 시모어 레보브를 스위드로 만들고 그는 완벽한 스위드가 되었습니다. 스위드는 그 동네의 상징이자 자랑입니다.
그는 그 별명을 보이지 않는 여권처럼 가지고 다녔다. 그러면서 미국인의 생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거리낌 없이 크고 부드럽고 낙관적인 미국인으로 진화해갔다. - 1권, 313쪽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이른바 '상식적'인 사람은 어디에서나 사랑받지요. 그들은 인기가 많고 누군가의 환상이 되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줍니다. 이 시대에 크게 사랑받고 있는 연예인들이 좋은 예지요. 유재석이나 원빈 같은 사람들(저도 물론 그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들처럼 하면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괜찮은 평판을 얻으려, 칭찬을 듣고 싶어 사회의 규범에 최선을 다해 순응한 경험 또한 누구에게나 있어요. 그러니 스위드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 되려 '스위드처럼 산다면 참 행복하겠다'고 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은 언제까지고 그의 편인 것처럼 보입니다. 스위드는 그에게 주어진 행운을 공기처럼, 피부처럼 간직하고 살죠. 그에게는 품위를 유지하고 보기에 좋아 갈등이 없는 - 사실 그 갈등은 보이지 않는 곳에 빼곡히 쌓여 있지만, - 자신의 삶이 도대체 왜 이상한 것이고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삶을 이루는 조건들이 대부분 충족된 사람들이 어째서 또 다른 것을 원하고 꿈을 꾸고 뛰어 넘지 못할 경지에 가고 싶어 하는지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토록 모범적인 스위드입니다.
왜 이런 아무것도 아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할까? - 2권, 138쪽
행복하고 아름다운 스위드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소중한 딸 메리. 스위드는 사랑하는 딸 메리가 저지른 사건으로 인해 이제 완전히 무너집니다. 처절히 부서지는 그의 성. 견고하고 우뚝 선 아름다운 그의 풍경이 잔혹하게 해체됩니다. 스위드는 전에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성공해왔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선의로 사람을 대하면 항상 그에 대한 보답을 받아왔기 때문에 메리가 저지른 테러를 받아들이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합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원인을 따지고 다른 이를 탓할 뿐입니다. 어리석게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대개의 '스위드'들이 내놓을 수 있는 보통의 반응이지요.
하지만 그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고, 범인은 그의 딸 메리가 맞고, 메리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삽니다. 그는 그것을 제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걸(없었다는 걸, 없을 거라는 걸) 힘겹게 깨닫습니다.
그는 대부분이 질서이고 아주 작은 부분만 무질서인 줄 알았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환상을 만들었는데, 메리가 그를 위해 그 환상을 해체해주었다. - 2권, 281쪽
그리고 언제나 반항적이던 그의 동생 제리,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는 제리, 스위드에 대한 제리의 냉혹하고 거친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는 왜 자신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제리를 그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
바로 그거야! 맞았어! 우리는 충분치 않아. 우리 누구도 충분치 않아! - 2권, 77쪽
을 남깁니다.
기대하는 것과 달리, 세상은 완벽하지 않고 '우리 누구도 충분'하지 않지요. 스위드는 그저 행운아였고 그 행운아에게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 수 있는 게 이놈의 세상, 이렇게 생겨먹은 세상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성공하고 친구가 배신하고 가족이 해체되고 억압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낭만적이고 이상을 꿈꾸던 사람이 가지려 했던 '미국의 목가'는 한낱 먼지처럼 작은 한숨에도 저 멀리 휘날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엄청나게 기쁠 때도 다음을 준비하고, 바닥에 있다가도 더 내려갈 곳은 없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주변을 생각하고 함께 분노하고 더불어 움직여야하는 것이겠지요.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는 치열하고 냉정합니다. 읽을 때보다 읽고 나서가 더 좋은 소설입니다. 다시 꺼내들기는 쉽지 않겠지만 꼭 한 번 읽어야 할 좋은 소설입니다. 한가로운 전원에 지어진 오래된 돌집, 그곳에 사는 완벽한 가족을 따라 삶의 애환을 함께 겪고 나니 어쩐지 스위드, 메리, 제리, 스위드의 아내 돈까지 모두가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자, 이제 스위드로 분한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를 기다리며! 지내기로 합니다.
(언제 개봉하나요...)
덧붙이기 하나.
저는 이 소설이 엄청나게 매력적인 인물, '제리'를 화자로 등장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합니다. 모두를 비난하고 세상을 등지고 제멋대로 살고 대체로 비관적이고 불가해하게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친형을 항상 비난하는 제리 말입니다. 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하지만 '미국의 목가'라는 제목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겠죠...
덧붙이기 둘.
철저하게 인물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미국의 근현대사, 그 다양한 사건들이 정말이지 '모범적으로' 작품 안에 함께 그려집니다. 그 세세한 역사적 사건이 익숙지 않았던 저는 때로 그런 대목이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지만요. 막상 책을 덮고 나니 바로 그 지점이 이 작품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