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벨 문학상은 언제나 기다려진다. 기대와 달리(?) 대개는 잘 몰랐던 작가여서 매해 10월이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는 심정이 되어 소식을 기다리게 된다. 마침내, 손꼽아 기다리던 발표가 나면 필자는 내처 수상 작가의 작품을 찾아 탐독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읽는 작가목록을 채우는 일은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올해도 새롭기만 한 작가(앨리스 먼로, 캐나다)를 발견했고 서둘러 그의 작품을 찾는 마음이 바쁘고 기뻤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존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그 연장에 있다. 헌책방에서 사냥꾼의 눈으로 두리번대다(책 소유욕이 많아 늘 괴롭다. 도서관과 헌책방이 없었다면 더욱 괴로웠을 테다.) 유독 이 책을 집어 든 데에는 표지에 큼지막하게 박힌 ‘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못내 끌렸기 때문이다. 쿳시는 노벨 문학상 수상 전에도 이미 부커 상을 두 번이나(1983, 1999) 수상한 최초의 작가로 유명했으니 그의 작품성을 의심할 이유는 거의 없겠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경력을 차치하고라도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담긴 단정한 문체, 치밀한 사유, 날카로운 질문은 꽤나 매력적인 가치를 발한다.


늙은 치안판사가 나른하게 관리하고 있는 평화롭던 제국의 어느 변경(邊境)에 수도의 경찰, 죨 대령이 찾아온다.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야만인의 존재를 밝혀내기 위해서란다. 치안판사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침묵과, 검은 안경으로 건강한 눈을 가리고 하찮은 것으로 신비함을 과장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지만 그걸 억누르려고 애”(11)쓰고 있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17)이다. 야만인에게 위협받은 적 없다고 대령을 안심시켜보지만 무위에 그치고, 정체 불분명한 야만인의 존재를 사이에 둔 치안판사와 대령은 묘한 긴장 관계에 놓인다. 과연 야만인은 존재하는가? 그들을 잡아들이면 제국은, 이 변경은 안전해지는가?


우리네 현실이 그렇듯이, 군인의 등장으로 이곳은 오히려 기습과 경계의 시대로 되돌아”(68)간다. “소녀가 강간을 당”(210)하는 범죄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야만인의 짓이라고 말하지만 위협적인 야만인은 본 적이 없다. 포로로 잡혀온 야만인들이라고는 노인, 어린이, 나약한 어부들뿐. 치안판사는 당신네가 찾는 야만인은 없다고 외치다 되레 반동인물로 낙인 찍혀 감옥에 갇히고, 고문과 모욕을 당한다. 평화를 원했던 주인공은 철저한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놀라운 이야기인가? 아니다. 이 치안판사의 이야기는 놀랍지 않다. 이 안에서 우리 주변을 발견하는 놀라움만이 있다. 제국(국가)이 확인되지 않은 정체의 야만인을 소탕하기 위해 공권력을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야만인에게 씌우고, 국가 스스로가 위기를 조장해서 권력을 공고화하는 작업은 역사 내내 계속되어 왔다.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그들에 의해 우리는 반복해서 타락하고 있다. 치안판사의 너는 이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어!”(181)라는 외침이 슬프고 또 괴로운 이유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필자가 지금 읽는 책이자 오늘은 사는 우리가 계속 읽어야 할 책이다.

 



나는 평화로운 게 좋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일 게다.(27쪽)




[<빅이슈코리아> 71호(2013.11)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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