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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가 단순하던 시절, 

저는 글로 표현하지 못할 마음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했고요, 편지로 마음을 자주 전했습니다. 마음이 글보다 단순한 세계에 살 던 때. 그 시간은 금세 지나갔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다 알지 못한 저는,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들은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진심이 통한다. 아름다운 환상입니다. 


과연 다른 이에게 투명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지금은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은 환상에 불과하다, 고 믿고 있습니다. 

(운이 좋아 이 믿음이 언젠가 부서지기를 바라면서요.)


만일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진심을 알아챌 수 있었다면, 

이 이야기들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카밀라와 지은, 엄마와 진남에 얽힌 이야기의 제목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인 것,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심연, 바다, 바다의 흔들림, 파도... 이런 잔상들을 함께 연상할 수 있거든요.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했던 카밀라의 삶 역시 제목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짐작하게 하고요. 


삶은 의외의 지점에서 새로운 길로 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그 지점이 새로운 길로 가는 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조차 시간이 지나야 알아챌 수 있지요. 삶은 늘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카밀라가 유이치를 만나고, 글을 쓰고, 낳아준 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지요. 

그리고 카밀라는 진실을 향해 나아갑니다. 진실

만일 영화에서라면 주인공은 꿋꿋하게 진실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가겠지만, 카밀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두려워하면서 한 걸음 힘겹게 내딛어요. 마치 우리의 그것처럼. 


하찮은 사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상식적 세계 전체와 맞서야만 하는 순간도 찾아오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50쪽


너라는 존재를 바꿔버려도 좋을 만큼 그 점들은 중요한가? 필연적인가? 진실은 과연 그토록 중요한가? -203쪽


그리고 주인공이 알게 된, 알아야 했던 진실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지나친 것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새로운 위치에서 생각해야 하는 사건들이 고구마처럼 달려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 매료된 건 그 때문입니다.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작품이거든요. 사람 사이의 간극이랄까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이랄까 하는 것들이 짐작할 수 있는 언어들로 짐작하기 힘든 마음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놀라운 책이지요. 놀라운 글이고요. 이런 책을 만나면 저는 다시 환상에 빠지고 싶습니다. 혹, 이심전심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이 작품이 매력적인 점은 또 하나 있습니다. 주인공이 운명에 지배되는 인물이라는 점인데요. 좀 독특합니다. 흔한 주인공들과 다르죠. 운명을 개척한다거나 바꾼다거나 하는 일은 그리 일어나지 않습니다. 카밀라는 진실을 탐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이내 그 진실에 지배되거든요. 

이런 점은 다분히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한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미래란 그리 존재하는 것 같지 않거든요. 구조에 압도되고 공간에 압도되는 것이 가녀린 한 인간이니까요.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285쪽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인 삶 안에서 인간은 운명에 지배되는 법이지요. 카밀라, 혹은 지은처럼. 




끝나지 않은 그들의, 우리의 이야기가 각자의 바람대로 흘러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나는 외로움 같은 것으로 에릭과 경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14쪽


슬픔을 처리하는 일이라면 어려서부터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이 상실감은 낯설기만 했다. -20쪽


뭔가 쓰는 순간, 되는 거지. -29쪽


빈 잔은 채워지기를, 노래는 불려지기를, 편지는 전해지기를 갈망한다. -34쪽


그 목소리가 번지고 또 번져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생각하고 있을 엄마에게 반드시 가닿을 테니 엄마는 곧 얼굴을 보여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70쪽


나는 인생의 불행이 외로움을 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불행은 불량한 십 대들처럼 언제나 여럿이 몰려다니죠. -82쪽


농부가 풍년을 기원하듯이, 두루미가 습지를 찾아가듯이, 이야기는 끝까지 들려지기를 갈망한다.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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