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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청년(악!!) 시절에 누군가 간혹 이상형을 물으면 윤동주를 꼽곤 했었어요. 

대개 돌아오는 반응은 

"에? 시인?" 이런 식이었죠. 

윤동주를 이상형으로 간직하면서 만약 시인이 살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시인은 변함없이 괴로워 했겠지만요, 적어도 우리는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조금 더 향유할 수 있었을 거예요. 지금 존재하지 않기에 더 아름다운 것들은 시리도록 애처로웠습니다. 이만저만 안타깝지 않았지요. 


나는 친구를 잃어야 하겠지만 조선인 죄수들은 현명한 동료를, 간수장은 용서를 빌 대상을, 간수들은 온화한 모범수를 잃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조선인들은 위대한 스승을 잃을 것이고, 태어나지 않은 일본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증언할 지식인을 잃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가지지 못할 순결한 시인을 잃어야 할 것이다. - 2권, 240쪽



제 닉네임 [동섣달꽃]은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를 일컬어 했던 '동(冬)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鯉魚)'라는 말에서 따 온 겁니다. 

12월 추운 겨울에 피는 꽃.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 강물 아래 헤엄치는 잉어. 어두운 시절에 눈부신 작품을 썼던 시인을 참으로 생각하게 하는 아주 매력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절, 저는 <윤동주 평전>을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남몰래 통곡하던 어머니를 읽으면서 함께 울었고요. 그리고 조금씩 잊히는 첫사랑 같은 존재가 되었는데... 


이 책을 만났네요? 하하. 

처음에는 몰입하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좋아하던 연예인의 사생활을 알게 되면, 왜 좀 실망하게 되잖아요. 같은 사람이라는 게 낯설기도 하고요. 그런 느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작가도 '인간 윤동주'를 그리는 데 적잖이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제가 그린 인간 윤동주는? 더 말수가 적고 단어를 아끼고 아껴서 말하는 사람이요. 어쨌든,)

오랜만에 시인의 삶도 상상해보고 중간 중간 시도 감상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시간이었습니다. 설레기도 했고요, 후반부 그의 죽음이 가까워 올수록 많이 슬펐습니다. 


책은 [열도 안의 가장 위험한 병균들을 모아 놓은 곳], 즉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통의 한 형무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진행됩니다. 일제시대,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조선인들이 모여 있어요. 당시 조선인은 병균이고 암세포이며 돼지였죠.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시간 낭비일 뿐이야. 조선 놈들은 똑같아. 더 나쁜 놈도 없고 덜 나쁜 놈도 없어. 모두가 주모자고 모두가 동조자지. 돼지는 돼지일 뿐이야. 더 잘생긴 돼지도 없고 덜 못생긴 돼지도 없다고!" -  2권, 165쪽


그런데 궁금합니다. 이런 횡포가 과연 '전쟁의 광기' 때문이었을까요? '악마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라 그랬던 걸까요? 

사실 제가 좌절하는 건, 지나간 사건과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며, 결국 악한 것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대는 악한 사람들 덕분에 늘 어둡죠. 어두운 시대라서 사람들이 악한 게 아니라. 지금도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요? 


다시 책으로 돌아와, 살인사건을 맡은 유이치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의외로 떠오르는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윤동주. 어두운 시절에 탁월하게 맑은 영혼입니다. 그나마 세상에서 숨 쉬고 살게 하는 것은 이처럼 드물게 아름답고 타협하지 않는 영혼일 거예요. 이 영혼은 너무나 빛나고 깨끗해서 시대에 가려지지도, 녹아들지도 않아요. 유이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동주와 책을 매개로 마음을 나누죠. 시인은, 윤동주는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를 통해 시와 음악과 삶을 생각하게 되는 영혼. 


소설 속에는 윤동주 보다는 덜 하지만 괴로워해서 악하고, 악해서 더욱 괴로워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저는 이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실제로 인간은 [괴로워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게 대부분이잖아요? 그럴 이유는 많으니까요. 가족들, 생계, 책임감 등등. 그것이 상식선인데요. 


무엇보다 자신이 상식에 의거해 살아가는 평범한 일본인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왜 이 전쟁을 막지 못했는지...... - 2권, 224쪽


소설 속 몇몇 주요 등장인물은 결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운' 일본인 간수는 특히요. 스기야마나 유이치 모두 그런 인물인데요. 이들의 내면이 의외로 너무 아름다워서 지나치게 소설 같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에나 있는 인물이라고요. 괴롭지만 너무 괴로워지기 전에 잊는다, 가 많은 사람들의 태도니까요.  

(반면 형무소장이나 간수장, 병원장은 철저한 전쟁광에 악한이잖아요. 이런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주요 인물 몇을 제외하고는 착하거나, 악하거나, 좀 단편적인 모습만 보여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아름답습니다. 

매일 악(惡)을 확인하면서도 희망을 갖게 하거든요. 순수한 선(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을 낙관할 수 있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아야 이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볼 수 있고 더러운 시대에 침을 뱉을 수 있어. 명심해라. 살아남는 게 승리하는 거야. 시체는 결코 만세를 부를 수도 침을 뱉을 수도 없어." - 2권, 168쪽



저는 아직 윤동주처럼 빛나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 제가 속해있는 어둠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못했어요.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탁월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고 

그 사람 덕분에 어두움을 괴로워하고 

악화가 아닌 '선화(善貨)'가 양화를 구축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어둠에 가보고 싶다는 쓸데없고 위험한 소망을 해봅니다. 


<별 헤는 밤>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아래에 전문입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볕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제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 1권, 9쪽


사라진 저작물 중에는 한 조선인 미곡상의 외상 장부도 있었다. 소각 이유는 '진위를 해독할 수없는 의미 없는 숫자의 무한반복'이었다. - 63쪽


그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망가뜨린 인간과 같은 인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린 아들을 안아 주는 아버지, 망가진 주방의 선반에 못질을 해주는 남편, 친절한 이웃일 그가 자신과 같은 아버지, 남편, 이웃을 개처럼 패고 있었다. - 115~116쪽


얼어붙은 밥덩이라도 주린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시체와 함께 잠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2권, 72쪽


전쟁이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들고, 세상이 우리를 더러운 짐승처럼 만들어도 우리의 영혼을 훼손할 수 없음을. - 95쪽


"말하지 못한 사랑도 사랑이야. 말해 버린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일지 모르지." - 137쪽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건 조선 놈들이 아니다. 나쁜 놈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어떤 민족이든 나쁜 놈들은 있다. - 159쪽


고통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겪어 온 그에겐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의미였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이기는 것이니까. -184쪽



p.s. 어쩐지 어색할 것 같아 책장에서 놀렸던 구효서 작가의 소설 <동주>를 꺼내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시인을 추억하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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