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계획 - 칼빈주의 시리즈 3
벤자민 B.위필드 지음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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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가 발달하자 사람들의 초점은 이제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맞춰졌다. 세상의 지배자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 부르짖으며 탈신본주의를 지향하기 시작 했다. 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 문화 등의 세계관은 이제 인간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자유, 평등, 박애로 대변되는 프랑스 혁명은 가히 인본주의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인간은 신권을 거부하고, - 물론 잘못된 신권 통치는 거부되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 인권을 존중하며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모든 것의 판별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 되자 구원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라는 이타적인 구원관은 자력구원관으로 변화 되었다. 이제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 했다. 그러한 생각은 인간의 관심을 더 이상 내세, 영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하였다. 인간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가 전부이기 때문에 이곳에 지상낙원을 구현하겠다는 열망이 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열망은 20세기 초 양차 대전으로 무참히 부서졌다.
 외부의 구원관의 변화보다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 내에 산재해 있는 여러 구원관이다. 외부의 구원관은 기독교 구원관의 강력한 변증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 단 이것은 기독교 구원관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원관이, 구원관의 불일치가 기독교 변증에 일정부분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

 

 이 책의 저자는 벤자민 B. 워필드로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이다. 워필드는 구 프린스턴 학파에 속하여 성경의 무오와 원죄, 예정, 제한 속죄론을 믿으며 다양한 저서와 서평 등을 통해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고, 변증하는데 노력하였다.  
 워필드는 이 책에서 여러 기독교 분파의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며 비교한다. 가장 먼저 개념의 차이를 설명하고, 작정에 관한 주장들을 도표를 통해 상세히 구분, 소개한다. 이 도표에서 크게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로 구분한다. 여기서 초자연주의는 다시 복음주의와 사제주의로 나뉜다. 복음주의는 제한 구원론과 보편 구원론으로 갈라진다. 이러한 네 가지의, 제한 구원론과 보편 구원론, 사제주의와 자연주의 아래에 여러 분파들이 속한다. 본문에서는 이 구분들을 다음과 같은 큰 카테고리로 소개한다. 즉 자력 구원설, 사제주의, 보편 구원론, 칼빈주의로 말이다.
  먼저 자력 구원설, 다시 말해서 자연주의에는 알미니우스와 펠라기우스가 있는데 이들 중 특히 펠라기우스는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이다." 이는 "인간 의지가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다는 핵심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자력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제주의에는 성공회, 로마교회, 희랍정교회가 속해 있다. 이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고 선포 되지만 ...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 직접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 조직, 특히 로마교회는 "... 인간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모든 사역을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하신다 ..." 며 교회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교회의 중요성을 주장하다보니 그 안에 있는 사제들이 핵심 역할로 작용하여 막강한 권한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보편 구원론에는 루터주의, 웨슬레주의, 순수 보편 구원론이 속해 있다. 이들은 위에 두 입장과 달리 - 칼빈주의 / 제한 구원론과 함께 - 개신교에 속하는데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을 원하시되, 개개인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차별이 없이 똑같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제한된 속죄로 택한 자들만 구원 받는 게 아니라 보편적 속죄를 통해 모든 자가 구원 받는다고 이야기 한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권한과 무게를 더 두고 있다.
 마지막 칼빈주의는 총 세 가지로 분류 된다. 철저한 제한 구원론에는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이 있고, 불친절한 제한 구원론에는 아미랄드주의(구속 후 선택설)가 있다. 저자는 제한 구원론을 "칼빈주의의 증표"라고 말한다. 제한 구원론자들은 "구원의 진행에 있어서 제한 구원론은, 이미 구원의 초자연주의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의 직접성 가운데 주어져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의 자율"보다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역, 즉 그분의 주권을 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특기 할 만 한 것은 구속 후 선택설을 주장하는 아미랄드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의 작정이 논리상 구속의 작정 뒤로 미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칼빈주의자들의 가장 낮은 가능성 또는 가장 낮은 실제성의 범주에도 이르지 못"하고 "가장 쇠약한 칼빈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결론은 제 5장 칼빈주의의 마지막 구절에 나타나 있다.

 

 "세상의 구원은 (개인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주 그리스도 자신의 불가항력적인 능력 안에서 그의 유일한 사역이 되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개인 구원이든 세상 구원이든, 구원을 믿을 보증을 가진 것은 칼빈주의자 하나뿐이다. 개인 구원과 세상 구원 모두는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근거는 무너지는 모래다."

 

  즉 이 책은 기독교의 다양한 구원관을 비교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실은 칼빈주의 구원관의 강력한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한 마디로 칼빈주의만이 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이 주장은 상당히 배타적이고,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참진리를 알 수 없는데 어찌 칼빈주의만이 옳다고 할 수 있는냐는 반론이 제기 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저자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종교이다. - 본인은 기독교를 종교라고 부르는 것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모든 것의 정점에 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이 계시기에 인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있기에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다. 칼빈주의는 이것을 고백하기 때문에, 본인 또한 이것에 도으이하기 때문에 칼빈주의를 지지하고, 지향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믿는 이들 조차 이 순서와 사실을 뒤바꾼다. 즉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이 홀로 계신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인간의 의지와 자율을 하나님의 주권보다 주위에 둔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보다 인간을 우위에 두는 말씀은 없음에도 그리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어쨌든 이 책은 주로 칼빈주의를 중심으로 다른 구원관을 살펴보기 때문에 다른 고백을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내용이 다소 부당하게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비록 이 책은 칼빈주의를 강력히 변증하지만 다른 주장들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주의자 뿐만 아니라 다른 입장에 있는 이들도 참고 할 만할 것이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보편 구원론 - 개신교에서의 보편 구원론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 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다원주의 사상을 따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에만 구원과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과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신적 속성은 만물에 내재 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천인공노 할 노릇이다. 특히 칼빈주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이러한 구원에 관한 외부의 위협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사분오열 되어 서로 다른 구원관을 내세우고 있다. 외부의 위협을 연합하여 막으려 하기는커녕 집안싸움에 바쁘다. 지금은 집안싸움을 할 때가 아님에도 말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그러한 입장차는 좀 더 좁혀 질 수 있을 텐데, 하나님보다 자꾸만 사람을 먼저 내세우는 기독교 내의 다른 주장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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