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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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예감이 옳았다. 영원할 것 같던 청춘은 참으로 짧았다. 우울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청춘이 아니었다.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 중 둘은 미국에 있어 얼굴 보기 어렵고, 국내에 있는 친구들도각자의 일이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 드문드문 안부 전화나 주고받는 정도다. 그래도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믿기지 않거나 어색한 날이면 포천에서의 그날 밤이 떠오른다.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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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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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년은 어쩌다 악의 선수를 흠모하게 되었을까. 그것은악이 아니라 패배를 흠모하는 걸 수도 있는데, 언제나 악이 패배하는 세계라니, 분명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어쩌면 프로레슬링이란 현실에서 실패한 선한 약자들이, 악을 물리치는 극본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시뮬레이션의 세계가 아닐까.
하지만 그 세계를 움직이는 돈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순진한 잡념일 것이다. 오히려 강한 것이 선이 되어버리는도착된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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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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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날의 시바스리갈은 가난과 슬픔과 좌절로 점철된 나의 지난 시간과의 작별이었다. 짜릿하고 달콤했던건 위스키의 맛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과의 작별의 맛이었을지 모른다. 그날로부터 나의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날이지 아니한가!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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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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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김명숙 화가의 표지그림에 매료되었는데, 그가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로 출퇴근하며 그리는 그림은 이렇게 묘사된다. "두려움에 시달리며 제 몸과 정신을 갉아대며 그린 그런 그림이라 그 정신과 노동과 결사적인 몸부림을 받아내야만 하는 종이는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며 작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가고 또 언젠가는 소멸될 수도 있는 종이 한 장. 그 위에 자신의 전 세계를 옮겨놓는다는 것. 어떤 위태롭고 아름다운 경지를 본 느낌이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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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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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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