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하지, 서울로 오고 나서는 여름이랑비를 기다린다. 비가 처마에서 떨어질 때, 우드드우드드 우산을 뜯듯이 빗방울이 쏟아질 때, 그럴 때 나는 겨우 숨을 쉬어. 여기도 별다른 곳이아니구나. 여기도 비 오는 곳이구나. 여기도 별수 없구나 생각하는 거지.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안도감인지 다른 사람들은 알까? - P29
완평에는 어디든 물이 있었다. 물을 보며 전철을 타고오는 동안 손열매는 고향 보령의 바닷물을 떠올렸다.바다가 누군가의 세찬 몸짓이라면 강물은 누군가의 여린손짓 같았다. 바다가 힘껏 껴안는 포옹이라면 강물은 부드러운 악수 같았다. 버스가 달리는 들판에도 천이 가느다란띠처럼 흐르고 있었다. - P23
손열매는 집으로 돌아가다 말고 한강 다리에 서서 밤물결을 내려다보았다. 밤의 한강은 광활한 우주처럼 고요하고 아주 검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이상한 얘기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조차 없을 것 같았고 말할 입과 들어야 하는 귀도 없고 자기 자신은 완전히 압축되어 티끌처럼 사라져 있을 것 같았다. - P20
사라진다.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 P342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해우가 내민 마지막 의뢰와 대상자를 들여다보았을 때조각의 머릿속에서는 류의 그 말이 새삼스레 메아리쳤다. -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