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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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부모님 간병이나 수술로 형제끼리 돈 갹출할 일이 생기는데, 똑같은 상황이라도 내살림이 빠듯하면 ‘형은 왜 그거밖에 안 내지?‘라고 생각하게되는 게 인간인 것 같다고. 반대로 내 상황이 좀 여유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자연스레 넘어가지더라고 했다. 자기가 원하는 건 큰 성공이나 호사까진 아니어도 살면서 그런 순간이 왔을 때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다들 너무 소박한데? 더 솔직한 거 없어?
활달하고 사람 좋은 박과장이 우동에 고춧가루 풀듯 분위기를 맵게 띄웠다. 그러자 한 신입이 "어차피 우리는 열심히 일해도 부모보다 못살 세대잖아요?"라고 했고 몇몇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걸, 십여 년 전 같이 입사한 동기들 중에서 비교적 ‘서민 출신인데다 ‘입신양명‘형에속하는 기태가 조용히 반론을 제기했다.
-그 ‘부모보다 못살‘이라 할 때 그 부모 좀 가져봤으면 좋겠네요, 나는.
순간 기태 쪽 테이블의 분위기가 조금 싸해졌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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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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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연애 상대가 아니더라도 희주는 ‘일단 만나면 기분좋아지는 사람‘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뒤 찝찝한 후회나 반추를 안 하게 만드는 사람. 상대에게 자신이 판별당하거나 수집당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사람. 근본은 따뜻하되 태도는 선선한 술친구였다. 물론 소문과 정치 없는 일터는 없고직장에서 진심이니 우정이니 하는 걸 바라는 것 또한 천진한 태도임을 알았지만, 살면서 ‘일단 만나면 기분좋아지는 사람‘
은 뜻밖에 드물고, 있더라도 그 수가 점점 줄기 마련임을 깨달은 기태는 희주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겼다. 아니 사실 그거면족하다 싶었다. "살맛난다 할 때 그 살맛이 이 살맛이구나" 장난치며 서로의 목이나 손등을 깨물고, 상대의 속눈썹과 귓바퀴, 몸냄새에 대한 칭찬을 남발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땐 육체의 쇠락을 과장하며 서로를 늙은 배우자인 양 놀리고, 그러면마치 노년의 남루와 공포가 줄기라도 할 것처럼 농담과 연민을 미리 당겨쓰고, 세상 무심하고 친밀하게 등과 두피에 난 여드름을 짜주고, 상처와 비밀을 나누고, 말을 아끼고, 오래 안고, 우리가 식물과 달리 똥도 싸고, 아름답지도 않고, 울기도하는 존재임을 가여워하고 수긍해주는 정도라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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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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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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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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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네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평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시우에게 좋은 일이잖아. 좀더 나은 일. 그런데도 시우 어머니가 ‘새집으로 계속 와주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왜 흔쾌히 대답 못한 걸까? 지금보다 십오분 더 멀어져서? 정말 그것 때문에? 순간 손에 쥔휴대전화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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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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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란등 아래서 은은한 형광녹색으로 빛나는 잔디며 더도 덜도 없이 딱 그 자리에 있어 풍경을 미적으로 만드는 수목이 근사해서였다. 더도 덜도 아닌 적절함.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무수한 시안을 버려봐서 알았다. 힘겹게 만든다 한들 반드시채택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잔디 위 널돌을 밟고 안으로 더깊숙이 들어가자 일층짜리 단정한 목조 주택이 자태를 드러냈다. 더운 나라 건물답게 시원하고 개방적인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돈이 아니라 감으로 꾸민 집. 것도 단순한 감이 아니라 훈련된 미감으로 꾸린 데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랜시간 햇빛과 바람, 빗물에 색이 바래 순한 나뭇결을 드러낸 문틀과 창틀, 고상하되 전혀 기름진 티가 나지 않는 담박한 그릇장, 세간의 배치와 배색, 그럴 리야 없겠지만 투숙객이 혹 초록에 물릴까 다홍과 주홍을 살짝 섞은 간이 화단까지 모든 게적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결국 어떤 공간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낡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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