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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이 세상을 나누는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나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 세상은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두 가지이다. 보이는 세상은 동경하는 세상과 혐오하는 세상으로 나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말그대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세상과 눈으로는 보고 있어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으로 나뉜다.
내게 보이는 세상은 협소하다. 동경하든지 혐오하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딱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동경의 대상이던 것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내게 보이지 않는 세상 중 그 존재 여부도 알 수 없는 세상은 어쩌면 언젠가는 내게 보이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고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은 어떤 연유로 그런 세상에 속하게 되어버린 걸까. 그건 나의 관심 대상 밖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의 발동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애써 보지 않으려는 세상 속을 들여다 봐야할 것 같다.
바람의 아이, 제이
고속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10대 미혼모에게 태어난 제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용케 그 운명은 비껴나갔고 제이는 돼지 엄마라 불리던 한 여성의 양자로 양육된다. 돼지 엄마가 세들어 살던 집 주인의 아들 동규와 함께 지내던 시간은 제이에게 있어 한 곳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시간이었다. 스스로 말문을 닫아버린 동규의 통역사 역할을 하던 제이. 그때 동규와 제이는 둘이자 하나였고, 하나이자 둘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동규가 말문을 트면서 제이와 동규의 연결이 느슨해져갔다. 게다가 재개발 바람으로 동규와 제이는 더이상 한곳에 살 수 없게 된다. 그후, 돼지 엄마는 약물중독자 기둥서방과 집을 나가고, 제이만 홀로 남겨진다. 그후 시설에서 잠시 살던 제이는 그곳을 나와 혼자의 삶을 시작한다.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떠돌게 된 것이다. 그후 제이는 가출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곳을 전전하다 폭주족의 리더가 되었다가 태풍의 소멸처럼 사라져 버린다. 남은 아이들에게 신화가 되어.
고슴도치들
10대들은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같다. 누가 자신을 공격할까 싶어 미리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 그 가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줘도 가시를 뉘일줄 모른다. 제이가 시설에서 탈출한 뒤 만났던 가출 청소년들은 가시를 뉘일줄 모르는 고슴도치같았다.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고 살아간다. 누군가 그 아이들에게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거야, 라고 물어본다면 돌아오는 건 비웃음 정도가 아니라 욕설과 폭력일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어 가출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어른들이 보기에 그 아이들은 스스로 하수구에 몸을 던진 거나 진배없는 삶을 사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제이도 처음엔 그 아이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고 말려 보려고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폭력뿐이었다. 또한 아이들 스스로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에 제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제이 역시 그런 길을 걷는다.
그후 제이가 속하게 된 그룹은 폭주족들. 이 아이들 역시 고슴도치들이다. 그들의 가시는 오토바이. 오토바이만 타면 무서울 것이 없는 아이들은 제이가 일으킨 태풍에 차츰 동화되어 간다. 처음엔 동규와 세상을 이어주던 작은 바람이었던 제이가 태풍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폭주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이 사회의 시스템에서 튕겨나간 이 아이들의 유일한 해방구이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왜 그렇게 삶과 죽음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것일까. 뾰족한 가시로 스스로를 찔러대는 것일까. 어쩌면 이 아이들 역시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그 진짜 이유를 찾고 싶어 그런 것일까.
천산갑들
우리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갑옷을 두르고 살아간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있으면 온 몸을 돌돌 말아 갑옷만을 내보이는 천산갑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를 위험요소로부터 지키기 위해 철저히 방어태세를 갖춘다. 태어났을 때는 누군가의 천사같은 자식이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거리의 아이가 되는 순간부터 천사는 없어지고 박멸해야만 하는 더러운 병균 취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어부터 한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동규의 엄마는 동규가 말문을 튼 후, 동규가 다니던 특수 학교의 교사와 아이들을 그렇게 취급했다. 우리 아이는 너희들과 달라, 이 병신들아 라고. 동규가 그들과 있을 때를 좋아했다는 걸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극단적인 예같지만, 실제로 동규 엄마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게 아픈 진실이다. 말로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 하면서 실제로는 수많은 선을 긋고 구획을 나누어 살아간다. 내게 해로울 것 같은 사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 모두가 부정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천산갑의 갑옷을 두르고 우리는 살아간다.
통역사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가는 거리의 아이들을 보듬어 주는 존재가 있다. 그들은 폭주족 아이들을 만나는 봉사자들과 경찰 승태, 진샘 등이다. 이들은 이 아이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배척하지도 않는다. 특히 진샘의 경우 떠돌아 다니던 제이를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엄마란 존재와 엄마의 따스함이라고는 알지 못했던 제이에게 허락된 유일한 따스한 품이었다. 비록 그 시간은 짧았을지라도.
세상의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과 이 세상과 연결된 가느다란 끈, 바로 이들 통역사이다. 하지만 이들 통역사들의 수는 너무나도 적고, 스스로를 고통으로 내모는 고슴도치들과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천산갑들은 너무나도 많다.
통로 끝 반쯤 열려 있는 문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십대 청소년들의 문제를 통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가정과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고 해결책을 찾으라 말하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가 철저히 선을 긋고 구획을 나눈 세상에서 추방되어 있는 길 위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향하는 통로의 끝에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보고 싶지 않았던 곳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 소설에 나오는 통역사들의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이 작품이라 생각한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부모에게 반항하고 나와 끼리끼리 몰려 살면서 추접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10대에 미혼모가 되어 자식을 버리는 일이나 생기고, 그 아이가 커서 문제아가 되는 거 아니냐. 개떼처럼 모여서 벌떼처럼 웅웅거리며 폭주하는 건 겉멋든 행동일 뿐이지 않냐라고 욕을 하거나, 귀를 막고 눈을 막고 그 문을 봉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비록 그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지는 못해도 그 문을 닫지는 말자. 시끄럽고 무례하며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듯한 목소리 속에 숨어 있는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올 날이 곧 올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