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의 잭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흰 눈(雪) 속에는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그 눈이 녹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눈은 언젠가 녹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 속에 감춰진 진실도 드러날 수 밖에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백은의 잭』은 흰 눈으로 뒤덮인 연말의 스키장을 배경으로 한다. 눈이란 것은 추리소설에서 밀실이나 클로즈드서클 트릭을 이용할 때 자주 이용된다. 내가 읽었던 소설 중 최고로 치는 눈 밀실 트릭은 요코미조 세이시의『혼징 살인사건』이다.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별채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 눈이란 것은 족적 등을 비롯해 흔적이 남기 쉽다. 따라서 발자욱 하나 남겨지지 않는 눈 밀실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긴장감을 주고, 또한 그 트릭이 얼마나 절묘한지가 밝혀지면서 큰 스릴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이 바론 그런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중 눈과 관한 것이라면 역시 마더구스가 이용된『백마산장살인사건』과『명탕정의 규칙』에 등장한 단편이 먼저 떠오른다. 전자는 3년전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눈덮인 산장 자체가 밀실이 되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번 작품은 어떨까. 이 작품은 1년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과 관련이 있기에 '복수'란 요소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특정한 스키장을 무대로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클로즈드서클 트릭의 요소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척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폭파범의 협박이라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드디어 큰 거 하나 터뜨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키장의 코스 어딘가에 폭탄을 설치하고 몸값을 내놓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재미를 더한다. 회사의 수익성과 범인에게 지불할 몸값을 저울질해 사건을 덮어버리고자 하는 스키장 경영진과 아무것도 모른채 희생당할지도 모르는 스키장 손님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스키장 관리 책임자, 그리고 몸값을 건넬 3명의 스키장 직원, 1년전 있었던 끔찍한 사고의 유가족인 부자, 폐쇄된 스키장과 인접한 마을의 관공서 직원들, 스키장의 스릴을 즐기러 온 손님들 등 등장인물이 꽤 많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들 등장인물들의 매력을 충분히 발휘시키지 못했다. 1년전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리에 부자의 경우 '복수'라는 동기가 있지만 굳이 폭파라는 위험천만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좋고, 스키를 좋아하는 노부부의 경우에도 어떤 동기도 없다. (돈이 목적이 아닐 것이라는 건 스위트에서 묵는다는 것만 봐도 안다) 스키장과 인접한 마을의 관공서 직원의 경우 스키장에서 폭파사고가 나면 자신들에게 더 불리할테니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스키장 경영진이나 직원들 역시 스키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 스키장이 폐쇄될테고 직장을 잃게 되니 딱히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몸값으로 수천만엔의 돈을 받으면 상관없겠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등장인물들의 대부분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그럼 등장하지 않는 누군가가? 이러니 맥빠지는 거지. 물론 이게 함정일 수도 있지만. (笑)

게다가 스토리는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처음의 방향성을 잃었다. 폭파범의 협박, 기발한 몸값 건네기 등으로 속도감과 긴장감을 주던 이야기가 의협심과 호기심으로 몸값 건네기에 초를 치는 인물의 등장, 위험구역으로 몰래 들어간 스키어들 등이 일을 꼬이게 만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자면 시선을 분산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많이 드러난 부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여기저기에 복선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거다' 하는 부분이 없었달까. '그래 그랬군'하는 정도라고 하면 될 듯 하다.

가장 이해가 안되는 건 역시 범인들의 동기였다. 허탈했달까.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결말이 너무 한번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바람에 속결로 끝을 맺었다라는 느낌만 준다. 옛날 동화처럼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책처럼 무자비한 살인마가 등장하거나, 처절한 범행 동기를 가진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 서스펜스를 기대하고 이 책을 잡은 독자들이라면 실망할 여지가 많다. (나의 경우 확실히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역자의 후기이다. 역자의 후기에 스포일러가 너무 많다는 것과 아무리 자신이 번역한 작품이라도 이렇게 칭찬만 나열하는 건 좋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후기부터 읽었다간 낭패볼 뻔 했다. 그리고, 이 소설이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는데 난 딱히 그말에 동의 못하겠다. 환경운동가들 중 이렇게 과격한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하고, 내용을 봐도 두어번 환경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결국엔 설원에서의 스키와 스노보드의 속도감과 짜릿함을 더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러니 그걸 가지고 환경문제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또한 진짜 범인을 알면 환경운동이나 스키장의 환경 파괴 이야기는 전혀 맞지 않단 걸 알게 된다. (苦笑)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10년 10월에,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10월에 나왔다. 다분히 겨울을 겨냥하고 쓴 의도가 보이는 작품이지만, 왠지 작가의 취미생활을 반영한 듯한 소설이란 생각이 미묘하게 드는 건 왜일까. 이제까지의 작품 대부분이 괜찮은 평가를 받는 대작가라서 이런 소설도 쓸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중 열손가락 안에 꼽는 작가이지만, 이 작품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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