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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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골집에 다녀왔다. 아부지께서 텃밭을 일구고 계시기 때문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땅은 습기를 머금게 되고, 그 습기가 마르는 것과 동시에 딱딱해지지만 호미질을 해서 갈아 엎으면 금세 포실포실한 느낌의 부드러운 흙이 된다. 그런 흙은 맨발로 밟아보면 그 보드라운 감촉에 발끝이 찌르르해진다. 그렇게 고와진 흙 위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금세 새싹들이 뽁뽁하고 돋아난다. 난 새로 갈아 엎은 상태의 보드라운 흙이 꼭 아이들 마음같다고 생각한다. 부드러워서 자꾸만 만져보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고, 아물어가고 하는 동안 딱지가 생기고 흉터가 남아 그 보드라운 흙은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덮인 곳이 되듯 딱딱해진다. 어른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의 두려움을 안다. 그래서 말랑말랑 포실포실한 흙으로 덮여 있던 곳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덮어 자신의 마음을 덮어 버리고 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보호막인양. 일단 딱딱하게 보호막을 친 마음은 쉽사리 열 생각도 못하고, 잘 열리지도 않는다. 그건 타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이미 아스팔트로 딱딱하게 덮인 마음은 더이상 다른 사람에게 열리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완전히 소통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 보호막 뒤에 숨어서 아주 조금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살아야 할까. 아니면 짐짓 자신의 마음을 감춘채 상대방을 대하고 살아야만 하는 걸까. 이럴 때 우린 어떻게 해야만 할까.

어린이책 작가 오명랑은 몇년 전 공모전에서 큰 상을 수상했지만, 그후로는 제대로 된 소설을 쓰지 못해 눈치밥을 먹고 사는 중이다. 직업은 작가인데, 수입은 한 푼도 없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며칠을 골똘히 생각하다 묘안을 떠올린 오명랑 작가. 그 묘안이란 바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 듣기 교실'을 여는 것이었다. 첫 수업날, 찾아온 아이는 달랑 세 명. 그중 하나는 아직 어려서 오빠를 따라 그냥 온 듯 하다. 오명랑 작가는 약간 의기소침해지지만 하나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수업을 시작한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까 하고 고민하던 오명랑 작가는 오랜 시간동안 마음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기로 한다. 자신의 마음을 꽁꽁 봉인한 채로 살아 왔던 그 시간동안 한번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건널목씨는 어느 날 훌쩍 아리랑 아파트에 나타났다. 그곳 후문 쪽에는 차도가 하나 있는데, 건널목이 없어 사람들이 차를 피해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길을 건너다니는 곳이다. 아리랑 아파트에 사는 쌍둥이 형제는 차가 없을 때 잽싸게 길을 건너려다 건널목씨의 제지를 받는다. 허름한 옷차림에 꾀죄죄한 모습, 머리에는 안전모를 쓴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경계하지만 건널목씨는 그냥 건너면 위험하다면서 등에 진 짐을 내려놓고 돌돌 말린 카펫을 펼쳐 놓았다. 어라라? 분명 카펫인데, 건널목처럼 줄이 그어진 카펫이다. 아저씨는 머리에 쓴 안전모를 신호등 대용으로, 카펫을 건널목 대용으로 하여 그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그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후 건널목씨는 매일 아침 아리랑 아파트 후문으로 나와 카펫을 깔고 임시 건널목을 만들어 사람들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경계하던 사람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날 건널목씨는 쌍둥이 형제가 중학생들에게 위협당하는 걸 보고 구해주게 된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어른들을 불러올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 건널목씨는 중학생들에게 구타당하고 만다. 그게 안타까웠던 아파트 사람들은 건널목씨를 아파트의 빈 경비실에서 살도록 배려해준다. 

건널목씨는 아침에는 임시 건널목을 만들어 보행자들의 안전을 책임졌고, 나머지 시간은 아파트 청소며, 재활용품 구분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파트 주민들은 바지런하고 마음씨 좋은 건널목씨를 신뢰하게 되었고, 혼자 사는 건널목씨에게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건널목씨는 한 여자아이가 밖에 혼자 나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도희로, 부모님의 싸움이 너무 심해 밖으로 피난을 나온 것이었다. 그후 도희는 집에서 싸움이 일어날 때 마다 그것을 피해 건널목씨가 있는 경비실에서 쉬다 가곤 했다. 건널목씨가 기거하는 경비실은 도희의 피난처이자 쉼터였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개교기념일로 학교를 가지 않게 된 도희는 건널목씨를 따라 태희와 태석이 남매가 있는 집으로 가게 된다. 아버지는 얼마전 돌아가셨고, 엄마는 집을 나가 지금은 둘만 살고 있다. 태석이는 학교에 가야 할 나이지만 학교에 가면 태희를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재활용품을 주워 팔고 있다. 도희는 태희와 태석이 남매와 금세 친해지게 되고, 태석이네를 놀리는 동네아이들을 쫓아 주기도 한다. 안그래도 힘겨운 아이들에게 왕거지라 놀리며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며 도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나이 또래엔 부모님이 꼭 필요한 나이지만 어느 누구도 없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태희와 태석이의 모습에, 부모님이 있어도 그 그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것이니까.

건널목씨의 경우, 예전에는 자동차 회사에 다녔지만 자신의 쌍둥이들을 자동차 사고로 잃었다. 그 아이들은 건널목이 없는 도로에서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랑 아파트의 쌍둥이가 건널목이 없는 교차로를 건널 때 위험으로 부터 보호해주려 했던 것이고, 부모님이 없는 태희와 태석이의 보호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널목씨가 한 행동은 단순히 보행자를 위한 안전한 건널목만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도희와 태희 남매가 만나도록 한 가교가 되어 주었고, 아리랑 아파트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소통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로도 도희는 태석이 남매를 자주 찾아 왔고, 아저씨도 종종 들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고 챙겨주곤 했다. 겨울이 다가와 건널목씨가 기름도 넣어주곤 하지만 아이들은 아껴쓰느라 손이 꽁꽁 얼어도 찬물을 쓴다. 그런 아이들이 가여워 건널목씨는 임시 건널목으로 이용하던 카펫을 아이들의 방에 깔아준다. 아리랑 아파트 후문에는 진짜 건널목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날, 아이들의 엄마가 돌아왔다. 꼭 2년만에. 태희와 태석이는 2년만에 보는 엄마가 낯설기만 하다. 특히 태희는 엄마가 자신들을 버렸다며 제대로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어른에겐 짧은 2년이었겠지만, 아이들에겐 너무나도 긴 2년이었던 것이다. 2년 만에 돌아온 엄마와의 미묘한 거리감에 슬픔을 더해준 것은 건널목씨가 그날 이후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건널목씨는 그후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건널목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또한 그 손길을 받아들이는 쪽도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그 사람보다 내 처지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럴때 눈높이를 맞추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럴 경우 받아들이는 쪽은 껄끄럽고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건널목씨가 내민 손길은 아이들의 눈높이였다. 받아들일 아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아이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손길이었다. 그건 진심일 때 가능하다. 힘들게 사는 아이들에게 돈몇푼 쥐어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까지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일을 건널목씨는 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사라진 건널목씨가 모르는 것이 있다. 태희는 지금 오명랑이란 필명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고, 태석이와 도희는 부부가 되었다는 걸, 지금도 애타게 건널목씨를 찾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건널목씨가 전해준 따스한 소통의 방법이 오랜 시간이 흘러 태희와 엄마 사이에 남아 있던 딱딱해진 앙금을 걷어내 줬다는 걸. 그때 태희는 2년 만에 돌아온 엄마에 대해 마음의 담을 쌓았고, 자신의 상처에 아스팔트를 덮어버린 채로 성장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치유가 된 듯 보였지만 여전히 그 일에 대해서는 딱딱한 부분이 남아 있었던 것이 이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다. 건널목씨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듣기 교실 아이들에게 풀어냄으로써 태희는 엄마와의 사이에 있었던 아스팔트 길에 폭신폭신 따스한 카펫 건널목을 깔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 보고, 자신이 상처를 준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가 그동안 가지고 살아온 죄책감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늘 걷고 있는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길은 아스팔트나 시멘트를 걷어내면 다시 흙길이 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것과 달라서 이미 상처의 더께가 앉아 굳어버린 길은 그 더께를 걷어내도 완전히 제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폭신폭신하고 보들보들한 카펫 건널목이 아닐까. 혹시 나와 누군가와의 사이에 너무 딱딱하고 꺼칠꺼칠한 시멘트길이 만들어졌다면, 그 길만을 탓하지 말고 내가 먼저 카펫 건널목을 깔아보자. 내가 한 걸음 그쪽으로 다가가면, 상대쪽에서도 한 걸음 다가와 줄테니까. 한 걸음 한 걸음이 더딜 수는 있어도 언젠가 꼭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느리게 걷게 될 그 길이 행복으로 가득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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