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천 정사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정사(情死)는 동반자살을 의미하지만 요즘 뉴스에서 종종 듣는 동반자살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즘의 동반자살은 경제사정을 비관한 일가족 동반자살이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모여 자살하는 집단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현세에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내세에서 사랑을 이루자는 의미로 함께 죽는 동반자살을 의미한다. 요즘은 정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 함께 죽을 일이 별로 없거니와 다른 문제가 앞서 고작 사랑 따위의 문제로 함께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정사란 이야기를 들으면 근대의 로망이 담긴 유산쯤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로망이랄까.
 
한편으로 난 일본인들은 정사를 좋아한다는 그런 생각도 하곤 한다. 이 작품집에도 정사를 다룬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만,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 와타나베 준이치의『실락원』도 정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도 정사를 시도하는 부분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 속에서는 정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또한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심심찮게 정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시대물 만화책같은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일본의 독특한 문화 - 솔직히 문화라고 하기엔 거부감이 들지만 적당한 용어가 없다 - 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작가는 왜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썼을까.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 시대 초기는 일본 역사에 있어서 무척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1차 세계대전 참전, 쌀값 폭등으로 인해 일어난 주민들의 폭동, 관동대지진, 경제 공황 등이 이 시기에 일어났던 큼직큼직한 사건들이다. 또한 이 시대는 계층간의 눈에 보이는 차별도 남아 있었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를 살다 보니 사람들의 생활이나 마음은 피폐해졌을 것이고, 그렇다 보니 내세를 약속하며 정사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도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이 작품집의 제목은『회귀천 정사』이지만, 사실 모든 작품이 정사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정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 그리고 사랑과 증오, 겉으로 보이는 사연 속에 감춰진 진짜 사연들은 때론 정사란 행위보다 더 아프고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등나무 향기>는 유곽이 늘어선 조야자카 고개에서 일어난 연속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야자카 고개의 유곽에 있는 여성들은 본가가 너무 가난해서 팔려온 경우도 있고, 오누이처럼 본가에 돈을 보내기 위해 유곽으로 들어온 여성들도 많았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 속에서 살던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몸파는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화자와 함께 사는 오누이는 시골에 있는 남편의 약값을 벌기 위해 여인숙에 취직한 경우로 남편 약값을 보내는 것에 등골이 휠 지경이다. 이는 유곽에 있는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 사는 대필가는 유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으로 과묵하지만, 가난한 유곽 여자들을 위해 무료로 대필을 해주기도 한다. 비록 팔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족이라며 꼬박꼬박 돈을 부치고 편지를 보내는 여성들의 사연을 전부 알고 있던 대필가는 이 여자들의 짐을 덜어주기로 했다. 대필을 하면서 편지 내용을 바꿔 이 여자들이 힘들게 번 돈을 집에서 편안히 받아 챙기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도박에 빠진 오빠, 병치레로 평생을 병상에서 보내는 남편 등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폐병으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그녀들 중에 몇명의 인생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인 <도라지꽃 피는 집> 역시 유곽을 배경으로 한다. 법적으로는 열여덟 살이 되어야 유곽에서 일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스즈에 역시 원래 나이는 열여섯이지만 열여덟이라 속이고 일하고 있다. 또래 소녀의 소녀다움이 짙은 화장과 나른한 표정 속에 묻혀 버린 스즈에는 근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온 형사와 만나게 된다.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보여도 입을 꼭 다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스즈에는 형사와의 몇 번의 만남 끝에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그날 밤 목을 매고 자살한다. 살해당한 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도라지꽃과 같은 도라지꽃을 손에 쥐고 죽은 스즈에의 자살은 두번째 피해자인 인형사와의 정사를 결행한 것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그후 이 사건을 함께 수사한 다른 형사의 편지를 통해 스즈에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풀리게 된다. 그녀가 형사에게 도라지꽃을 던졌던 이유, 그녀가 도라지꽃을 쥐고 죽었던 이유가.

세번째 이야기인 <오동나무 관(棺)>은 야쿠자와 야쿠자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여인을 사랑해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이 형님으로 모시던 남자들 죽인 누키타와 누키타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여인 기와 사이에 끼게 된 쓰기오. 누키타는 기와를 안고 싶으면서도 차마 그리할 수 없어 쓰기오가 그녀를 안게 한 후 쓰기오를 안는 남자다. 누키타와 기와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쓰기오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키타는 쓰기오에게 자신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두목을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이미 누키타에 길들여져 누키타의 명을 따르게 된 쓰기오는 결국 두목을 죽이고 만다. 누키타는 왜 두목을 죽이기를 원했을까. 기와의 말에 따르자면 기와를 죽이는 것이 맞는 일일텐데. 하지만 이 일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쓰기오는 전쟁에 동원된다. 그곳에서 겨우 살아온 쓰기오는 그동안 기와가 누키타를 죽이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쓰기오는 기와와 누키타 사이에 있었던 일, 그리고 누키타가 두목을 살해하도록 한 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게 된다. 누키타와 기와가 했던 둘만의 주사위 놀이의 의미도.

네번째 이야기인 <흰 연꽃 사찰>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혼란을 겪는 시로의 기억 속에 숨겨진 어머니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로의 어머니는 불행한 별 밑에서 태어난 아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성장한 불운한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로의 어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고, 어머니가 네살되던 무렵에는 아무 이유없이 한 여자가 자살한 일도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던 시로의 어머니는 세이렌지라는 절의 주지에게 시집을 갔고, 시로를 낳았다. 하지만 그후 절에 불이나 아버지는 죽고, 시로와 시로의 어머니는 절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된 것이다. 시로는 때때로 어린 시절의 꿈을 꾼다. 어머니가 한 남자를 죽이는 꿈을. 또한 절이 불에 타는 것을 지켜보는 꿈도 꾼다. 그리고 어머니가 연꽃을 파묻던 장면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꿈이나 기억에 대해 어머니는 침묵을 지킬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시로는 어머니의 비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엄청난 비밀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다섯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회귀천 정사>는 다이쇼 시대의 천재 가인 소노다 가쿠요의 삶과 그가 남긴 작품에 관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 각각 가쓰와라기 정가(情歌)와 소생(蘇生)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에 담긴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에 실린 다섯작품의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두 번의 정사 미수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쿠요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이 작품이 씌어진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경악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진실을 알고도 가쿠요와 정사를 실행하려 했던 여인들의 사랑이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온다.<회귀천 정사>는 예전에 미스터리 앤솔로지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다시 읽어도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회귀천 정사>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다자이 오사무가 떠오르게 된다. 그 역시 두 번의 정사 미수 후 세번째 정사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부분은 미시마 유키오를 떠올리게도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쿠데타 해프닝 - 마지막 작품 <천인오쇠>를 출판사에 넘긴후 자위대 본부에 난입, 쿠데타 촉구 연설후 할복 자살 - 은 그가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죽음이란 의식을 치루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데 이 작품 속의 가쿠요 또한 자신의 작품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정사를 일으켰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렌조 미키히코의 화장(花葬)시리즈 여덟편 중 다섯편을 한데 묶은『회귀천 정사』의 각 작품에는 꽃이 등장한다. 등나무꽃, 도라지꽃, 오동나무꽃, 연꽃, 창포꽃이 바로 그것인데, 이들 꽃은 각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꽃이 주인공인 셈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남성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며, 이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시대 초기가 된다. 즉, 일본사에서 근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이나 물건들에서는 옛것의 향기가 물씬물씬 배어나오지만 스토리 자체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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