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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너무 어렸을 때라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지만, 어린 시절의 난 꽤나 별났던 모양이다. 그중 하나는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이다. 당시 4살무렵이었던 나는 집에서는 밥을 하나도 안먹어서 걱정이었는데, 동네에 계신 이웃 할머니댁에 놀러 가서는 강된장을 숟가락에 콕콕 찍어서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더란다. 그런 버릇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도 이어졌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갈때는 모퉁이를 돌아 할머니 집만 보이면 뛰어가서는 "할매, 밥!"이라고 외쳤다. 밥이든 죽이든 상관없었고, 더운밥이든 찬밥이든 상관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할머니 집만 보이면 배가 고팠다. 물론 우리 할머니니까 그렇게 응석을 부렸겠지만,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남의 집에 가서 밥 얻어 먹는 걸 좋아했다. (저학년무렵까지) 그중 한 집이 할머니댁 근처에 있는 집이었는데, 그집 딸이 나보다 3살정도 많은 언니였다. 놀러가는 건 핑계고 그 집에서 아침이며 저녁까지 먹고 왔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 짓을 그때는 참 뻔뻔하게도 저질렀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에는 그런 버릇이 싹 없어졌다.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가끔 친구집에 가기는 해도 밥을 먹는 건 고역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단순히 사춘기를 지나 그런 게 부끄러운 일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어렸을 때의 난 우리집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집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우리집과 다른 식사문화며 분위기 등이 좋았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커서는 그런 일을 꺼리게 된 것이 내가 다른 집에 가면 그 집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였을거라 생각한다. 밖에서 만나면 내가 사는 집의 분위기는 상당히 많이 감추어진다. 하지만 집이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면 난 밖에서의 나와 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된다. 친구도 마찬가지겠지. 밖에서 만나는 친구와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마주하는 친구의 분위기는 분명 달랐다. 그 거리감이 난 조금 두려웠었다.
이처럼 집이란 공간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특유의 분위기를 갖게 한다. 각각의 집안 사정이 따로 있어서 각각의 분위기가 나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집과 비슷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역시 똑같지는 않다. 그래서 집이란 공간을 소재로 씌어지는 이야기는 어느 집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듯 하다.『소란한 보통날』에 등장하는 미야자카家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마, 아빠, 4남매의 6인 가족의 구성은 얼핏 보기에 굉장히 평범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정적인 큰언니 소요는 결혼해서 살고 있고, 둘째 언니는 직장에 다닌다. 셋째인 고토코는 지금은 무직 상태로 밤의 산책을 즐기고, 넷째인 리츠는 조용한 아이로 피규어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는 가족의 식탁을 차릴 때 한껏 멋내는 것을 좋아하고, 아빠는 규칙적인 생활을 중시한다.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들의 일상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큰언니는 결혼생활이 원만해 보이지만 갑자기 집을 나와 이혼을 한다고 하고, 작은 언니는 임신한 직장 동료가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키운다고 한다. 고토코는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그와 대화하는 걸 보면 평범한 소녀가 아니란 생각이 들고, 리츠는 남자 아이인데도 피규어 작업을 즐기며, 또래답지 않은 세상을 초월한 언사를 자주 내뱉는다. 이들이 모이고 모여 생겨나는 이야기는 분명 일상의 이야기인데도 독특함이 물씬물씬 배어난다. 그렇다고 멀리하고 싶은 가족은 아니다. 오히려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족이고, 어디에나 있을 법은 일들이 일어나는 집안 풍경이라 마음이 푸근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저 정도는 특이하다고 할 만하게 아니잖아, 라는 감상이랄까. 그래, 특이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특별하다.『소란한 보통날』은 미야자키家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밀도 높게, 쫀득쫀득하게 표현되어 있다. 평소같으면 무심코 넘어갈 이야기, 평소같으면 모르고 지나칠 이야기이지만 이 밀도가 이들의 특별함을 더해준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싶어진다. 내 어린 시절의 버릇이 튀어나오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流しのしたの骨(싱크대 밑의 뼈)라고 하는데, 문득 영어 표현인 skeleton in the closet(벽장 속의 해골)이 떠오르는 제목이다. 벽장속의 해골은 가족의 감춰진 치부나 비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의 원제는 어떤 가족만이 가진 독특하고 특별한 분위기라는 의미를 가진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지만 집이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만 보이는 어떤 것, 그런 의미가 아닐까. 미야자카家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뜯어 보면 매우 특별하다. 이처럼 집이란 공간에서의 특별함은 세상의 모든 가족에 해당되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가족들에겐 그 가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그들의 보통날을 소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