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 밤 모든 바에서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난 술을 싫어한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싫어한다. 물론 적당히 - 사실 술을 마시면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마시는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대개 술마시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당히를 모르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 오래된 친구는 놀란다. 너 술 잘 마시잖아? 그렇다. 난 술을 잘 마셨다, 예전에. 대학에 들어가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첫번째 길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업보다는 수업이 끝난 후 술을 마시러 가는 걸 즐겼다. 때로는 수업을 째고 술을 마시러 간 적도 있다. 낮부터 술을 마시다가 새벽까지 마시고 담날 수업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러다가 병원에 두어번 실려간 적도 있다. 그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술을 싫어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술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합없이 싫고, 술 냄새도 싫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렇게 마셨을까. 그래, 바보같지만 오기때문이었다. 그냥 술을 잘 마시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열심히 마셨고, 열심히 취했고, 마시는대로 주량도 늘었다. 때로 블랙아웃 -필름이 끊긴다는 것- 도 있었고, 기절해서 하루종일 잔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술로 찌든 대학생활을 거친 후에는 거짓말처럼 술에 입을 안댔다. 술 마신 후에 남는 기분 나쁜 감각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난 체질적으로 알콜이 잘 받는 체질은 아니다. 마시면 얼굴이 금방 빨개지고 손바닥 발바닥에 열이 나고 온몸이 간지러워진다. 그래서 마시면 안되지만 그땐 그렇게 마셨더랬다.
그런 과정을 거쳐와서 그런지 지금은 일년 열두달 술을 한방울도 안마시고, 술을 마시고 싶단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와는 다른 이유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마시는 걸까. 술이 맛있어서? 맛있긴 개뿔. 사실 술이 맛있는 건 아니잖아?
술을 끊지 못하고 술만 먹는 사람들을 알콜 중독자라 한다. 그렇다. 술은 중독이다. 그렇다면 왜 중독이 되는 거지? 맛있는 음식에 중독되는 사람은 없는데 왜 술에는 중독이 되는 거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고지마 이루루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왜 알콜에 중독되는지 알게 되고,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서른 다섯에 죽을 거란 예언을 세사람에게나 들은 고지마 이루루는 알콜중독자로 응급입원한 상태다. 조금만 더 술을 마셨으면 그대로 죽었을거란다. 고지마 이루루는 18년동안이나 줄창 술을 마셔왔고 알콜중독의 스텝을 착실하게 밟아왔다. 알콜 의존상태를 넘어 연속음주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정도 상태가 되면 술말고는 입에 들어가는 것도 없다. 때론 술도 받지 않아 피를 토하기도 한다. 피를 토하는 건 몸속의 장기가 나 죽겠다고 하는 소리없는 외침이나 마찬가지이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욕도 돌아왔고, 몸 상태도 좋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서 이젠 치료가 다 된 것 아닌가 하는 착각도 한다. 이게 중독자들이 넘어야 할 첫번째 거대한 산이다. 보통 이 시기가 되면 다시 술을 마셔도 괜찮을 거란 착각을 하고 다시 술을 마시다가 급성 중독으로 쓰러지게 된다. 고지마 이루루는 심각한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같은 병실에 입원한 40대 남자는 간이 거의 다 망가진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몰래 술을 마신다. 이 남자의 경우 환각증상도 꽤 심했던 모양이다. 난 마약같은 것만 금단증상이 심한 줄 알았는데, 술도 금단증상이 엄청나다는 걸 이 작품과 아즈마 히데오의 만화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연속음주상태까지 이른 사람들은 손이 떨리고, 벌레가 온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에, 환청이 들리거나 환각이 보이기도 한단다. 게다가 자신의 가까운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피해망상증에까지 시달린다. 도대체 술이 몸속에서 어떤 짓을 하길래 이런 상태까지 이르게 되는 걸까. 아마도 술이 사람의 뇌에까지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이겠지.
한동안 착실히 치료를 받던 고지마 이루루는 어느 날 꿈에서 20대의 나이에 죽어버린 친구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는 꿈을 꾼다. 천상의 음료같은 그 맛을 잊지 못한 고지마는 결국 산책을 나갔다 들어간 메밀국수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이어 또다른 가게에서 폭음을 한 후 병원에 돌아온 고지마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십대 소년이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것이다. 연극을 하고 싶어한 꿈 많은 소년,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소년. 고지마는 소년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한편 친구의 여동생 사야카는 고지마에게 질타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고지마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죽은 후에 남겨진 추억속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지 말고, 상처투성이에 구멍난 삶이라도 현실을 살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숨겨왔던 자신의 집안 사정에 대한 글을 보여주며 그가 스스로 암흑의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도록 도움을 준다.
이 소설은 알콜중독으로 입원한 고지마의 투병기에 대한 이야기이자, 알콜중독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며, 알콜중독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작가 자신도 알콜중독으로 입원한 경력이 있어 이런 소설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의 경험인만큼 더욱더 절실한 경고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의외였던 것은 알콜중독이 개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었다. 성격나쁜 주치의 아카가와와 고지마의 대화를 보면 그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공인된 마약 = 술이란 공식이 나오는데, 실제로 알콜중독에 이른 사람, 알콜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마약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 외국의 경우 합법약물과 술을 동시에 마시고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엔 유명인들이 많지. 일본의 경우 특이하게도 술 자판기가 따로 있다. 컵술도 자판기에서 살 수 있다. 자판기란 것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술을 살 수 있으니 누구나 마실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일본 정부의 주류산업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도 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아니던가. 어른들의 모임에서는 술이 빠지지 않는다. 내가 모임을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술때문이다. 밥먹고 나서 술을 먹든지, 밥을 먹으면서 술을 먹든지. 그리고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고, 나와서 또다른 술집으로 간다. 내가 보기엔 이런 모임은 절대로 건전한 모임이 아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도 불리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참 엿같은 현실. 요즘 들어서는 이런 부분이 많이 사라진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어른들의 모임은 술판이다.
작품속의 고지마 이루루도 이 작품을 쓴 작가 나카지마 리모도 알콜중독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가 아니라 알콜중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알콜중독은 스스로가 자각을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난 술을 좋아하는 것뿐, 중독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콜중독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결국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상황이 되면 빈곤의 악순환이 아니라 알콜의 악순환이 되어 술에 절어 지내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알콜중독자들은 이 책을 읽지 않겠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고 난 저런 상태가 되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겠지.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나 알콜중독은 정말 무서운 거야 라고 몸서리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난다. 고지마 이루루도 알콜중독자들에 관한 책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으니, 알콜의존증이나 알콜중독인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안주 삼아 마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치만, 당신 그렇게 살다간......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