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문명이 발달하면 인간은 더욱 이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성의 껍데기로 자신의 야만성을 교묘히 가리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강력범죄 뉴스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지능범 사건이라는 사기사건 같은 것도 늘어났지만 반대로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범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현대 사회이다. 교묘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며 범행강도를 점점 더 높여간다. 이런 사건이 늘어난다는 것은 범인이 피해자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물화(物化)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 속 범인이 모든 것을 한편의 연극처럼 여겼듯이 말이다.

주택가의 한적한 공원에서 여성의 팔 한쪽과 핸드백이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하는『모방범』은 피해자의 가족, 범인, 가해자의 가족, 경찰 등 다양한 사람들을 내세워,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입장에서 범죄를 맞닥뜨리게 되고 그에 의해 무너지고 변해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범인의 동기나 범행방식 등이 중요시되지 않는 건 아니다. 범행동기와 범행방식을 통해 범인의 삶과 범인의 심리에 대해 파고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범행에 대한 추리와 범행동기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가족

작품속에서는 다양한 피해자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많은 피해자의 가족이 존재하게 되지만 포커스를 받는 인물은 공원에서 발견된 핸드백의 주인인 후루카와 마리코의 할아버지인 아리마 요시오와 핸드백의 첫발견자이자 예전에 일어났던 일가족 참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족인 쓰카다 신이치 두 사람이다.

신이치는 자신의 가족이 몰살당한 것은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신이치는 또다른 살인사건의 증거가 버려진 현장을 발견하게 되니, 정말 일반인이라면 평생 겪어도 되지 않을 일을 연속으로 겪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신이치를 괴롭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의 딸이 수감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신이치를 집요하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다른 일같으면 차라리 잊어버리려는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자신의 가족이 참살당한 일을 잊을 수 없는 신이치는 괴로움에 번민한다.

요시오 할아버지는 귀한 손녀딸이 행방불명된지 3개월에 돌아온 건 핸드백 뿐. 게다가 경찰의 미숙한 처신에 마리코의 엄마이자 자신의 딸인 마치코마저 정신착란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리코가 사고를 당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듯 했다. 자신의 딸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담대하게 처신할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런 반면 마리코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마리코와 별거중인 시게루는 이 상황에서 이혼까지 요구하고 나오는 것이다. 요시오의 고통은 범인의 전화로 가중된다. 요시오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 하지만 요시오는 침착함과 냉정함으로 범인의 도발에 쉬이 넘어가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해 나간다. 하지만 세상은 요시오가 희생자의 가족이란 것을 알고 그들 피하기 시작한다. 그 근처에라도 가면 역병이라도 옮을 듯이. 그 범죄가 자신에게 옮겨올까봐 걱정이라도 하듯이.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두부 가게 할아버지에서 단숨에 희생자의 가족이란 낙인이 찍혀 더이상 일반인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주위 사람이 갑자기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일은 일반인에게 너무도 갑작스럽고 익숙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피해자 본인이나 유족은 그런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매뉴얼이 없으니까요. 악의를 품은 인간이 친절을 가장하고 접근해와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늘 사기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권 / 269p)

뿐만이 아니다. 손녀를 죽인 범인에게 희생당한 또다른 희생자의 가족들을 이용해 사기를 치려는 사람까지 나타난다. 희생자의 가족의 고통보다는 그들이 고통때문에 사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것이다.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난 그게 싫어. 난 아무리 자신을 책망해도, 조금씩 죽어가도, 가만히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아니야. 이제 더이상은 싫어." (3권 / 280p)

모든 범죄 중에서 가장 잔혹한 범죄는 살인이다. 요시오의 말처럼 살인은 피해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마저 철저히 무너뜨린다. 신이치가 자신의 가족참살에 대해 떨칠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듯이 요시오 역시 손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요시오는 진범 X가 잡힐 때까지 잘 버텨오지만 진범이 잡힘과 동시에 무너져 내린다. 그를 지탱하고 있던 축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때 오열하던 요시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진범이 잡혀도 마리코가 돌아올 일은 영영 없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큰 고통이 아닐까. 범인이 밝혀져도 범인이 잡혀도 범인이 사형된다고 해도 희생된 가족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피해자 혹은 희생자

범인들에게 농락당하고 살해당한 여성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납치되었고, 감금되었고, 고통받다 살해당했다. 이는 범인의 이야기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이 희생된 여성들은 여러번 살해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여자에게 있어 강간은 살인이나 다름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범인 중 한 명인 구리하시 히로미는 여성들을 강간하고 사진까지 남겼다. 피해자 여성들은 살아 남기위해 그 모든 것을 이 악물고 견디지만 결국 용도가 다한 물건처럼 페기처분되었다.

하지만 이 여성들을 다시 한 번 살해한 것은 그 뉴스를 시청하는 대중들이다. 살해당해 버려진 여성들에겐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사람들은 왜 여성이 피해자일 때 그토록 잔인해지는 것일까. 특히 원조교제를 한 사실이 드러난 한 피해자 여성의 경우 범죄의 희생자가 된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진다. 당연히 살해당한다? 도대체 누구의 논리이기에 이런 논리가 나온 것이지? 세상에 당연히 살해당하는 사람은 없다. 그 어떤 일을 하건, 어떤 인생을 살아 왔건 당연하게 희생되어야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그렇지 않다. 뭔가 남자관계가 복잡했으니까 그럴 것이고, 만약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면 멋대로 상상하기도 한다. 뭔가 드러나지 않는 게 있을거야, 라고.  

"우리들 여자는 거의 항상 살해당하는 측에 있어." (3권 /300p) 

위 문장을 보고 난 여러가지 의미의 살해를 떠올렸다. 직접적으로 목숨을 빼앗기는 것도 살해이지만, 강간을 당하는 것도 일종의 살해이다. 또한 매스컴과 대중들의 입방아에 올라 씹히다 버려지는 것도 살해이다. 이럴 경우 자신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살까지 하는 피해자 여성들이 많은데, 이런 건 매스컴과 대중에 의한 간접살해라고 말하고 싶다.  

용의자와 가해자의 가족

가해자의 가족 이야기는 다카이 가즈아키의 여동생 아야코와 신이치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의 딸인 히구치 메구미로 집중된다. 나중에 다카이 가즈아키는 범인이 아니라 밝혀지지만, 일단 용의자 혹은 범인으로 낙인찍힌 순간 그 사람은 범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나중에 아무리 정정보도가 나가도 사실은 뒤바뀌지 않는다. 진실은 안개 너머에 존재하고 상상이 덧입혀진 사실만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 아야코가 등장했을 때 내가 생각한 아야코는 꽤나 강한 여성의 이미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구리하시 히로미에게 이용당하는 오빠를 지켜주려 했고, 자신의 오빠가 범인으로 몰리자 그것을 해명하고 의혹을 풀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세상의 눈앞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아야코는 히구치 메구미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야코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은 다카이 가즈아키와 구리하시 히로미와 동급생이었던 아미가와 고이치가 등장하면서이다. 아미가와 고이치는 아야코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고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마저 조종하기 시작한다. 대중의 무서움을 맛본 아야코에 게 있어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아미가와 고이치뿐인 것이다. 무너져가는 아야코를 보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아미가와 고이치가 누군지도 모른채 그렇게 기대다니, 마음같아서는 책속으로 뛰어들어 정신차리라고 해주고 싶었다. 워낙 힘겨운 일을 겪다 보니 아야코는 어린 시절 자신이 만난 아미가와 고이치가 어떤 존재였던지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아야코는 결국 이용만 당한채 버려졌다. 

한편 신이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메구미는 이기적인 것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부류다. 자신의 아버지가 범행을 저지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습에 고개를 휘휘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석방되면 외국으로 여행을 갈 꿈을 꾸는 모습에 이 아이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용의자 혹은 범인

처음에 범인은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로 보도되지만 다카이 가즈아키는 범인이 아니다. 다카이 가즈아키는 어린 시절부터 구리하시 히로미에게 이용당해왔다. 하지만 자신이 지능이 낮아서가 아니라 선천적인 질병때문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후 부쩍 달라진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구리하시 히로미를 구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구리하시 히로미는 어둠에 깊이 발을 담궈 버렸고, 그 결과 다카이 가즈아키는 범인 X의 새로운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다카이 가즈아키는 어찌보면 무척 안타까운 인물이지만 결국 자신의 가족을 '범인의 가족'으로 만들어버린 인물이기에 그에게 동정이 가지 않는다.

구리하시 히로미는 자신의 누나의 망령에 지배당하면서 살고 있었다. 태어난지 1개월만에 죽어버린 누나는 어머니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에 히로미는 그에 대한 반발로 여성들을 납치, 감금, 고문, 살해한 것으로 나온다. 히로미는 누나의 망령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히로미의 부모, 특히 어머니의 경우에 히로미를 정신적 · 신체적으로 학대한 것은 맞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서 히로미의 범행 동기에 대해 절대 수긍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계획한 브레인은 범인 X이다. 그 역시 나중에 밝혀지지만 남다른 집안 사정등 어두운 과거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행을 저지를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은 모든 범행을 자신의 훌륭한 연극 한 편이라 생각했고, 피해자, 피해자의 가족, 경찰, 대중 모두를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여겼다.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2권 / 203p)

그는 자신의 범행을 순수하게 즐긴다. 세상이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에, 자신은 주목받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목받고 싶은 생각에서 모든 범죄를 기획했다. 요즘 범죄 중에는 이런 무차별적인 범죄도 많이 일어나는데 범인 X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대에만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실패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관찰자 혹은 구경꾼들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는 관찰자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취재해 르포를 쓰는 것, 그것이 그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난 시게코를 보면서 또다시 기자란 사람들에 대한 구역질을 느꼈다. 그녀가 쓰는 건 이야기이지 결코 진실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취재를 바지런히 한다 해도, 그녀가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쓴다 해도, 그녀가 쓰는 문장에서 사람들의 이미지는 재창조되고 사건은 또다른 옷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주위의 눈이란 그런 것이다. 진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과 직면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해석을 '진실'로 채택하는 것뿐이다. (3권 / 377p)

시게코나 매스컴 관련자들, 그리고 사건의 추이를 바라보는 대중들은 주위의 눈일 수 밖에 없다. 내가 겪지 않은 이상 그 사건에 대해서는 상상할 뿐이고, 나름대로 납득할 결론을 내버리는 것이다. 나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주위의 눈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나 나와 관련된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발표된 사실들을 납득해 버린다.

경찰은 '용의자'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매스컴은 '범인상'을 추측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은 겁을 먹으면서도 다음 희생자가 누구인지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 (2권, 95p)

끝이자 또다른 시작

이 모든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신이치가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을 직시하고, 메구미의 시선을 피하지 않게 된 것처럼, 마치코가 서서히 충격에서 벗어나 회복을 보이는 것처럼, 요시오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다시 일어난 것처럼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갈 것이다. 물론 그 상처는 희미해질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꽤나 오래전에 카피캣(Copycat)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시고니 위버 주연의 영화로 모방범죄에 관한 영화였는데, 모방범죄가 일어나는 하나의 패텬을 보여준 영화였다는 기억이 난다. 그후에 미드에서 본 모방범과 모방범에 관한 이야기들에서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수되는 모방범, 감옥에서 또다른 모방범을 양산하는 수감자 등에 관한 내용이 주로 등장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이 끔찍한 연쇄살인범이 저지른 범죄가 또다시 부활할 것이란 생각에 등줄기가 오싹해져왔다. 그리고 그런 범죄는 또다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길 것이다.

<1~3권 통합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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