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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스와 버질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논픽션보다 더욱 사실적인 픽션이라고 하면 난 먼저 수용소 문학이 떠오른다. 헤르타 뮐러나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을 읽으면서 때로는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것 보다 더 지독한 음습함과 절망과 좌절과 슬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걸 보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서 늘 다큐멘터리 형식이나 역사책 형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겨진 어떤 것,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픽션의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 떄로는 더욱 직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작품 속 주인공인 소설가 헨리가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픽션과 논픽션 두가지를 함께 엮여 만든 플립북 출판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그 의지가 출판관계자, 역사학자등에 의해 무참히 깨지는 상황을 통해 잘 보여진다. 헨리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무조건 논픽션이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어떤 답도 도출하지 못한 채 헨리는 절필하게 된다. 헨리는 아내와 세계적인 어떤 도시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생활에 익숙해져 행복을 느낄 즈음 그는 어떤 독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소설가 헨리와 박제사
독자가 보낸 편지에는 플로베르의 단편 소설 하나와 희곡이 들어 있었다. 묘한 부분에만 형광펜을 칠해놓은 단편 소설은 동물을 하던 한 남자가 결국 패륜을 저지르고 난 후 종교에 귀의하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었지만, 헨리의 독자는 유난하게도 동물 학살에 관한 내용에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가 보낸 희곡 역시 독특한 매력이 있어 헨리는 그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그 편지의 주인공은 박제사. 헨리는 박제사와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그의 희곡 내용을 보완해주고 희곡 내용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이야...
헨리와 박제사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정체를 절대 드러내지 않았던 박제사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음습하고 음험한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설마 그랬을 줄이야. 난 오히려 그가 쓰는 희곡을 보면서 오히려 반대쪽의 인물이 아닌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낸 플로베르의 단편소설에서 중요시한 부분이라든지 그가 희곡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점점 드러날 수록 역시 엄청난 비밀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은 든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희곡을 썼을까.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과거에 대해 엄청난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박제사는 평생을 이 희곡을 써왔다고 하는데 그는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 아니면 구원? 홀로코스트에 관한 색다른 접근? 박제사를 얼핏 보면 동물에 대해서는 관대해 보이지만 결국 그것도 아니란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원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헨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고통과 공포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즉 헨리만을 위한 홀로코스트이다.
베아트리스와 버질
희곡의 주인공인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셔츠나라의 등허리 지역에서 쉬고 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이야기는 배에 관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과일 배를 모르는 베아트리스에게 버질은 이런 저런 설명을 하지만 완벽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결국 말이란 건 모든 것을 전해줄 수 있는 듯 보여도 결국 제대로 전해줄 수는 없단 말일까. 그렇게 본다면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있어도 단 하나만의 진실은 없는지도 모른다는 의미일까.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지독한 배고픔과 공포, 아픔에 시달린다. 이들이 배고픔과 공포, 아픔에 시달리는 이유는 희곡이 점차 진행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당했던 일들, 그들이 목격했던 일들, 그리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닥친 공포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남긴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이란 것을 읽으면 미묘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게임의 내용 역시 홀로코스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존재하는 빛과 어둠은 차라리 외면해 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이제껏 겪었던 일은 너무나도 끔찍하지만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은 빛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걸 떠올려 보면 빛과 어둠은 늘 공존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란 것을 두고 빛과 어둠의 공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다른 소설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레고리로 존재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고,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 방법이 홀로코스트란 주제에 과연 효과적이었을까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얀 마텔은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실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직접적인 묘사가 아닌 알레고리를 통해 그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