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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ㅣ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가형사 시리즈 중에 내가 읽은 건『붉은 손가락』과『악의』딱 두 권이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지만 이게 시리즈란 것을 알고 처음부터 읽어야겠다고 결심한지 오래. 하지만 신간이 워낙 자주 나오는 작가인지라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손에 들게 되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간뿐만 아니라 장르소설 자체의 신간이 미친듯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여름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가형사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는 가가 교이치로가 형사가 되기 전, 대학생일 때의 이야기이다.
대학 졸업반이라고 하면 이런저런 일로 아주 바쁠 시기이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구직 활동. 빠르면 2학기에 취직을 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졸업 후 취직을 하거나 가을 즈음에 취직 자리가 정해진다. 가가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7명은 대부분 자신의 진로를 정해 놓은 상태이다. 취업 준비와 연애로 바쁘면서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이들에게 어느 날 닥쳐온 끔찍한 소식. 친구 중 한 명인 쇼코가 자신의 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방은 완벽한 밀실, 하지만 자살이라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 정말 자살일까, 아니면 타살일까.
이런 의문이 풀리기도 전 또 한번의 끔찍한 일이 남은 친구들에게 벌어진다. 검도를 잘하던 나미카가 다도 작법 중에 독극물 중독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그곳은 일종의 밀실이었고, 은사를 제외하곤 전부 친구들이었다. 만약 타살이라면 그중에 범인이 있다는 것. 쇼코와 나미카는 정말 살해된 것일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왜?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부분에 감탄을 했지만 역시 그 속에 감춰진 동기랄까, 그러한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런 일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건 역시 이런 미묘한 시기가 겹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첫걸음은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친한 친구 사이도 틀어질 수 있고, 서로 경쟁자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야할 때 누군가가 나의 발목을 잡는다면? 이럴 경우 어떤 생각이 들까. 여기서 조금만 틀어지면 나의 미래 계획 자체가 깡그리 무너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고 그저 상대에게 안좋은 일이 생기기를 기원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위축되고 손이 벌벌 떨릴지도 모르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범인에게 동정이 가는 건 아니다. 범인을 궁지로 몰고간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검도 대회, 테니스부, 공학과 실험실, 다도 작법 중 하나인 설월화 게임, 알콩달콩 연애 등 대학생 시기의 풋풋함과 행복함이 넘치는 가운데에 숨어 있던 악의. 그것이 싹이 트고 위험한 향기를 뿜기 시작할 때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결국 인간은 그토록 이기적인 생물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역시 상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게 인간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추악한 진실과 아름답게 포장된 거짓 중 어느 것이 더 낫냐는 은사님의 말도 곰곰히 생각해 볼 꺼리였다. 사실 진실이란 드러나면 아름답지 않은 게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듯 추악한 진실에 아무리 겉포장을 한다 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을 떠올려 본다면 결국 이 포장은 봄햇살에 눈 녹듯 싸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처한 현실도 무거웠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댓가는 더욱 무거웠다. 그걸 짊어지고 살수는 없었을테지, 이들은.
아직 미숙하지만 미래의 명탐정의 면모가 곳곳에서 묻어나는 대학생 가가의 첫번째 사건. 아마도 가가는 이 사건으로 큰 트라우마를 떠안게 되었을 것 같다. 교사냐 형사냐를 두고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던 그였지만, 이것 역시 가가에게 큰 짐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건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역시 가가의 큰 장점이자 특징이 아니었을까. 또한 이런 일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결코 저버리는 일이 없다는 것도 가가의 매력 중의 하나일 것이다. 먼저 읽었던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좀 다르게 풋풋한 매력과 더불어 미숙함이 느껴지지만 가가의 사랑 이야기 등은 가가 역시 냉철한 형사만이 아닌 한 여성을 진심으로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남자란 걸 느끼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가가를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요소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