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사고 나서 책장에 모셔 놓은지 꽤나 오래되었지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늘 읽고 싶어하면서도 쉽게 손을 들지 못하는 그런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있는 얀 마텔의 모든 책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역시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는 상태이니까. 그럼 오랫동안 방치상태에 두었다가 이제서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얼마 전에 출간된『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읽고 싶어서 그 전작인『파이 이야기』를 손에 들게 되었다. 읽고 나서는 왜 진작 안읽었지, 라는 후회를 곧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런 이유라도 읽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인도 소년 파이네 집은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다. 매일 동물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나날들은 평화롭고 안락했다. 학교 생활은 즐거웠고, 종교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당, 이슬람 사원, 힌두교 사원을 찾아 다니며 성직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즐기기도 하는 등 파이의 하루하루는 늘 즐거웠다.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이해심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좀 짓궂긴 하지만 좋은 형을 둔 파이의 가정도 평온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인도 내의 상황이 불안해지자, 아버지는 동물원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이민하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동물들을 다른 동물원으로 보내기로 하고 캐나다행 화물선에 몸을 실은 파이네 가족. 하지만 태평양을 건너던 중 화물선이 침몰하게 되고, 파이는 혼자 살아 남게 된다.

파이가 몸을 의지하고 있는 작은 구명보트 안에는 하이에나 한 마리,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 그리고 오랑우탄 한 마리가 있었다. 얼룩말로 오랑우탄도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히고, 파이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때 나타난 건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리처드 파커는 하이에나를 잡아 먹고 결국 배 위에는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이 남게 된다. 

언제 구조될지도 모르는 태평양 한가운데, 바닷속에는 상어가 헤엄치고, 배 위에는 호랑이가 있다. 파이는 절망을 느끼지만, 살아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살아 남을 길은 리처드 파커를 조련시키는 수 밖에 없다. 이런 아슬아슬한 균형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생존에는 물과 음식이 필수이다. 리처드 파커의 배를 곯리지 않기 위해 파이는 물고기, 바다 거북, 상어 등을 사냥한다. 처음에는 채식주의자인 파이가 물고기를 잡고 먹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생존이란 것 앞에서 그런 것은 사치일 뿐이었다. 

227일동안 태평양을 떠다니며 벵골 호랑이와 생존 게임을 벌여야만 했던 소년 파이. 파이는 회상한다. 만약 리처드 파커가 없었더라면 자신은 일찌감치 죽고 말았을 것이라고. 가족을 모두 잃고 아무도 없이 바다를 떠도는 존재가 되었더라면 살고 싶은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리처드 파커라는 벵골 호랑이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이 오히려 생존 의지를 북돋아주었다는 것이.

절망과 희망은 늘 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이런 면에서 보자면 늘 같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사람은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기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좀 둔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사람들은 희망보다 절망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희망과 절망은 늘 같은 곳에 존재한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의 개념도 없을 것이고, 희망이 없다면 절망의 개념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극한의 순간에 달해서야 희망과 절망은 늘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파이에게 있어 리처드 파커의 존재는 절망이자 희망이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충격적이고 한편으로는 무한한 감동을 안겨준다. 파이 이야기의 경우 충격적인 이야기보다는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 보이지만,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하다. 너무 깊어 바닥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내는 이야기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파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망도 희망도 신(神)도 결국은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4-1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저 아직까지 파이 이야기 모셔두고 있습니다.
표지도 다를 정도입니다. 언제 사다둔것일까요. 흠.
리뷰 읽으니 얼른 읽고 이번에 나온 후속작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스즈야 2011-04-11 01:32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러시군요. 전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읽기전에 급하게 읽었어요. 왜 안읽었을까 하고 후회했죠. 교님도 얼른 읽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