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지옥 이타카
유메노 큐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 중 하나인『도구라마구라』로 한국 독자에게 잘 알려진 유메노 큐사쿠의 소설집인『소녀지옥』은 소녀지옥 3연작과 3편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이다. 아직까지『도구라마구라』는 읽지 못하고, 앤솔로지 추리단편집에 실린 <쇠망치>란 작품 단 하나를 접했던 나는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도구라마구라』는 이 책을 읽은 후에 읽어야지 하고 미뤄 둔 상태다. 그 이유를 들자면,『도구라마구라』는 장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작품이 처음으로 국내에 발간된 작품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내가 단편이란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에 읽었던 <쇠망치>도 짧지만 강렬한 단편이었기에, 유메노 큐사쿠 역시 단편도 잘 쓰는 작가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편을 안읽은지라 장편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할 주제는 못되지만...)

소녀지옥의 첫번째 작품인 <아무것도 아닌>은 허언증을 가진 히사구메 유리코란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호사로서의 능력도 출중하고,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가짐도 좋아서 병원 사람들을 비롯해 환자들에게도 사랑받는 히메구사 유리코. 하지만 그녀의 허언증은 그녀를 점점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간다. 처음에 그녀에 대해 아무 의심이 없었던 의사 우스키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말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된 후, 그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밝혀지는 그녀의 비밀.

간호사로서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왜 거짓말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걸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겹게 살아온 히메구사 유리코의 거짓말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1930년대의 일본은 남성중심의 사회에다, 신분에 대한 차별도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녀는 거짓말로 자신을 꾸밀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꿈은 간호사를 넘어 의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살인 릴레이>는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 친구의 복수를 하려던 여성이 오히려 연쇄살인범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친구가 살해당한 방법을 이용해 그를 죽이고 자살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이 여성은 버스회사에 차장으로 근무했지만, 여성 운전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의 일본에서 여성운전수라니, 아마도 씨알도 안먹힐 이야기였을 것이다. 앞에 나온 히사구메 유리코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남성중심의 사회의 벽앞에서 좌절했으리라. 

소녀지옥 3연작 마지막 작품인 <화성의 여자>는 앞부분은 신문 기사 형식이고 뒷부분은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여학교에서 일어난 수수께끼의 방화살인사건이란 것을 소재로 그 사건 뒤에 감춰진 한 여성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처럼 큰 체격을 가지고 있어 늘 놀림감이 되어 왔지만, 사진기자의 꿈을 품고 있던 한 소녀는 믿고 있던 교장 선생에게 순결을 빼앗긴다. 가족마저 등을 돌려 더 큰 상처를 받게 된  소녀는 교장에 대한 복수극을 펼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교장선생과 학교직원의 비리를 고발함과 동시에 겉으로는 교육자의 탈을 쓰고 있엇지만, 속은 짐승이었던 남성들을 대한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소녀지옥>에 실린 세편의 작품 모두 1930년대 남성중심의 사회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의사, 여성 운전수, 여성 사진기자. 이들이 꿈꾸었던 직업은 당시 여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것이었다. 이런 사회적 벽앞에 이 여성들은 좌절했고 절망했다. 그런 이유로 유리코는 허언증으로 자신을 의도적으로 꾸며냈고, 도미코는 상대 남성을 살해했고, 화성의 여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교장 일당에게 복수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당시 남성주의 사회에 대한 이들의 저항의 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들은 정말 죽은 것일까? 이는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는다.

소녀지옥 3연작 다음에 실린 <동정>은 자신의 남편을 살해하고 재산을 가로챈 후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는 루리코란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연히 루리코의 도망을 돕게 된 한 남자의 루리코를 보는 시선의 변화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작품이다. 처음에는 천사처럼 보였던 루리코가 왜 결국엔 추한 마녀처럼 보이게 되었을까. 극단적인 남성의 시각을 잘 표현한 작품. 정말이지 남자들이란...

<여갱주>는 일본 공산당 간부를 파멸로 몰아간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작가 후기를 참고 하자면 이 작품의 소재는 1932년 적색 갱 사건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몰락해 가는 일본 공산당과 스스로 부르주아의 투사가 되어 제국주의에 편입해 가는 여성의 모습이 아주 대조적으로 묘사되는 작품이다.

마지막 수록 작품인 <연기가 피어 오르지 않는 굴뚝>은 정숙한 백작 부인의 이면에 감춰진 섬뜩한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성들이나 저지를 것 같은 끔찍한 살해행각을 벌여온 후 가장 자신다운 방법으로 숨진 난도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이 작품집에 나오는 여성들 중 가장 섬뜩한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난도 백작이 이런 살해행각을 벌인 이유에는 남편의 가학적 학대란 것이 암시되어 있다. 결국 그녀는 살아생전의 남편이 자신에게 해온 끔찍한 일에 대한 복수를 다른 식으로 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녀지옥』에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 보면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성들은 남성중시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삶을 선택하는 대신 남성중심의 사회에 대해 저항하고 복수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런 면면들은 이 여성들을 단순히 팜므파탈로 보이게 할 수 있지만, 그녀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역동적인 시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긴 했지만, 이는 소설이란 장르가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환상성이 가미된 미스터리, 그리고 당대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고발하는 있는 『소녀지옥』은 남성 작가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그녀들의 삶의 고단함과 그녀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차별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집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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