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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6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추영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3월
평점 :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 중 하나로 잘 알려진『흑사관 살인사건』. 나는 아직 이들 책 중 단 한 권도 접하지 못한지라 일단 오구리 무시타로의 이 작품을 먼저 선택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제일 먼저 선택한 이유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번역문제로 말이 많은 작품이라 먼저 읽어 치우자, 라는 생각때문이었달까. (笑) 스스로도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일단 내 목표는 이것을 첫번째로 하여 두번째는 나카이 히데오의『허무에의 제물』, 마지막으로 유메노 큐사쿠의『도구라마구라』를 읽는 것이다. 그건 이 정도로 이야기해 두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과거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넣어둔 성관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흑사관(黑死館). 흑사관의 원래 명칭은 후루야기 성관이지만, 사람들에게는 흑사관이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 흑사관의 주인 산테츠 박사는 유럽에서 의학과 마술을 연구한 인물로, 남녀 네명으로 구성된 서양인을 자신의 자식으로 삼고 흑사관에 감금한 채 길러 왔다. 흑사관이 지어진지 약 40여년, 흑사관의 주인 산테츠 박사가 기묘한 방법으로 자살한 후, 흑사관에는 더욱 음침한 공기가 흐르게 된다. 그리고 도저히 사람이 저질렀을 것 같지 않은 살인사건이 연속으로 발생하게 되는데...
흑사관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은 정말 기묘해서 범인이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밀실에서 발견된 빛으로 둘러싸인 시체, 갑옷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사용인을 비롯해 죽지는 않았지만 역시 기묘한 방법으로 범인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정말 지옥에서 악마가 찾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게다가 흑사관 내부의 모습도 기괴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서양식 건물인 흑사관 내부는 다양한 용도의 방과 기기묘묘한 장식품으로 가득찬 곳이다. 이런 장식품 하나하나 역시 모두 의미를 가지고 범인에 의해 재배치 되는 등 이 작품은 탐정인 노리미즈 린타로와 범인의 두뇌 싸움이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탐정으로 등장하는 노리미즈 린타로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겠더이다. 문학, 철학, 종교, 과학, 음악, 신비주의 등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곁들여 이 사건을 수사해 나가는 노리미즈는 수없이 많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해 나가는 식으로 사건을 파헤친다.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인간인지라 때로는 잘못된 가설을 세우기도 하지만 결코 기죽지 않고 또다른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이용한 비유인데, 이런 부분들이 제대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보니 자꾸만 맥이 끊기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이런 부분은 좋은 번역이었을지라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데, 번역이 엉망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근데 문제는 노리미즈만 이런 박학다식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집사도 그렇고 사서실 담당 노부인도 그렇고 비서도 그렇고 얼마나 박학다식하신지, 노리미즈와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시더이다. 그렇다 보니 검사인 하세쿠라나 수사국장인 구시마로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벙찐 듯한 표정을 짓는 게 그냥 마구 상상이 되더이다. 나도 역시 그랬으니까.
번역의 문제에다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줄줄 늘어 놓아 읽기 힘든 부분은 분명 있었으나 작품 자체로만 평가를 내린다면 이 작품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작품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후루야기 家 혈통과 관련된 비밀, 감금된 채 40여년을 살아온 남녀 외국인 네 명에 관한 비밀은 이 작품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작품은 마술과 저주, 등신대의 걸어다니는 인형 등이 등장해 신비주의적이고 오컬트적인 냄새가 퐁퐁 풍기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이 가장 큰 매력이다. 범인은 도대체 이런 복잡 기괴한 트릭을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트릭은 역시 이 기묘한 가족 구성원의 특성과 깊이 연괸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수긍이 가게 되는데, 이런 부분은 감히 독자로서는 추측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감춰둔 비밀이라고 생각된다.
『흑사관 살인사건』은 많은 독자들에게 '번역이 최악인 작품'으로 악명이 높은(?) 작품이라 읽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읽기 시작했건만, 도대체 뜻을 알 수 없는 비문들의 난립으로 읽는 내내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좋은 번역이었을지라도 워낙 작품 내용이 복잡 기괴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번역이 엉망이다 보니 내용 파악은 고사하고 문장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많이 힘들었다. 보통 이 정도 분량의 책이라면 몇 시간 내에 읽을 수 있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나눠서 며칠에 걸쳐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번역만 제대로 되었더라면 정말 재미있었을 작품인데,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