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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
아베 고보 지음, 송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익명이란 것은 익명의 기부자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블로그에서 쓰는 닉네임은 내 이름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 이 닉네임을 통해 난 또다른 사람으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런 네트워크 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상대도 나에 대해 잘 모르고 나도 상대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쓰는 글에는 나에 대한 짐작을 할 수 있는 글들이 포함되긴 하지만 그것으로 나에 대해 전부 알 수는 없다. 물론 일부러 숨기는 것도 많지만. 꼭 필요한 정도만 공개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익명으로 또다른 세상에서 살아갈까. 어쩌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부딪히는 현실과는 다른 편리한 점이 많아서 그렇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어찌보면 얄팍한 관계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정도로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처음부터 선을 긋고 시작한다는 느낌이랄까. 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시대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은 더 작은 존재가 되어 간다. 사람과 사람이 더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컴퓨터 뒤에 몸을 숨기고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있다.『상자인간』에 등장하는 남자가 상자속에 몸을 숨긴 것처럼 철저한 익명성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와 우리가 다른 것은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 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컴퓨터 뒤에 숨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네트워크에 연결한다는 점이다. 숨긴다는 것은 같지만, 아예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숨기는 것과 존재는 드러내지만 다른 얼굴로 드러낸다는 차이점이랄까.
책을 읽으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화자는 남자임이 분명한데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연결되는지가 헷갈렸다고 할까. 마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싶어서 상자인간이 된 한 남자. 그는 상자안에서 모든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게 그는 상자속에서 밖을 엿보는 것이다. 완전한 고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세계에서 고립시킨다고 할까.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보는 자이다. 그것도 엿보는 자이다. 그는 어느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상자속에 들어가 살아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모두 버리고 세상에서 부유하는 존재랄까. 하지만 세상은 그를 보지 않는다. 보이지만 보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는 세상이 복잡해져서 사람의 존재가 작아진 것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너무나도 적다. 그래서 이 상자인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베 고보의 다른 작품인『타인의 얼굴』은 자신의 얼굴을 잃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본 뜬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면『상자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두 편의 작품 모두 자신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한 사람은 철저히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르다. 어찌 보면 두 인간형 모두 현대인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네트워크 상에서 철저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사회 그리고 사람의 존재가 작아진 사회에서 자신을 열외인간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부분이자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