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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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란 단어를 보면 우리는 먼저 사랑 고백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누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고백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고백이란 것이 늘 즐겁고 행복한 기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책『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좀 다른 의미의 고백이다. 여기에서의 고백은 수치스러운 사실의 고백이다.

나는 이 글이 단순히 흥미로운 기록에만 머물지 않고 상당히 유익하고 교훈적인 글도 되리라고 믿는다. […] 대개는 체면을 중시하고 남을 배려하는 조심성 때문에 자신의 과오와 결점을 남들 앞에 드러내기를 꺼리지만, 그런 소망이야말로 내가 그 조심성을 버리고 기탄없이 내 잘못을 고백하는 이유일 것이다. (9p)

이글만 봐도 이 자전적 에세이가 작가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작품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작가 토머스 드 퀸시의 수치스러움이자 스스로 잘못이라 하는 것은 아편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진통제로서 아편을 사용했지만 어느새 아편이 주는 쾌락에 물들어 아편을 과용하고 남용하게 된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해 어떻게 아편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편 중독이 되어 어떤 생활을 했고, 그후 아편 때문에 어떤 고통을 겪었으며, 아편을 끊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책의 1부는 토머스 드 퀸시가 아편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관한 글이지만, 대부분은 청소년시절에 겪은 고통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누이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이후 후견인들에게 맡겨진 드 퀸시의 어머니와 드퀸시의 형제들. 그러나 그들은 후견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드 퀸시는 그들에게 반발했다. 결국 학교에서 도망 나와 런던에까지 이르게 되는 드 퀸시의 나날들은 굶주림등과 같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때 얻은 위장병은 20대에 몇년간 잠잠했으나 결국 재발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드 퀸시가 위장병 때문에 아편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치통이 심해 아편을 진통제로 처방받았고 그후 그는 아편의 놀라운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오오, 맙소사!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내 마음이 가장 낮은 나락에서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 안에 세계가 계시되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이제 내 눈에는 지극히 하찮은 일이었다. 이 소극적인 효과는 내 앞에 펼쳐진 적극적인 효과의 거대함에         그렇게 갑자기 드러난 신성한 쾌락의 심연 속에 삼켜지고 말았다. (86p)

그대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오, 공정하고, 교묘하고, 강력한 아편이여! (106p)

아편은 드 퀸시에게 있어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당시 아편은 일상적인 약으로 쓰였다고 책에 나온다. 또한 술값보다 싼 편이라 누구나 아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드 퀸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문인들 역시 아편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고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즉, 아편은 드 퀸시 뿐만 아니라 다른 문인들에게도 창작의 영감을 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 퀸시는 아편을 복용함으로써 더욱더 머리가 명쾌해졌다는 이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습복용은 중독 현상을 수반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진통제역할을 했던 아편은 쾌락을 주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물론 창작의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옅어지게 되고 끔찍한 악몽의 시대가 펼쳐졌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깨어났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더 이상 잠자지 않겠다." (163p)

얼마나 고통스러운 꿈을 꿨으면 더이상 잠을 자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될까. 인간이 피로를 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데에는 휴식이 꼭 필요하다. 특히 수면은 인간에게 있어 꼭 필요한 부부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드 퀸시는 잠을 자는 것을 거부할 정도가 되었느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결국 그는 아편을 끊을 결심을 하게 된다. 아편이 주는 일시적 작용으로 자신의 인생을 담보잡히기엔 그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3부의 내용은 드 퀸시가 아편을 끊으면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앞의 1, 2부와 다르게 매우 딱딱한 문체로 씌어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몇년이 지난 후에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앞부분과는 좀 단절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앞부분이 산문시같은 문학적 느낌을 담뿍 담고 있었다면 뒷부분은 보고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부분의 내용에서는 세익스피어, 밀턴과 같은 문인들의 글이나 신화나 성경의 내용을 차용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뒷부분은 할 말만 하고 끝맺고 있다. 어쩌면 더이상 긴 이야기가 필요 없다는 작가의 판단이 개입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 독자들의 관심이 맴도는 진짜 중심은 아편쟁이가 아니라 아편이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쾌락을 가져오든 고통을 가져오든, 아편의 불가사의한 작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이 글의 역할도 끝난 것이다. (164p)

이것은 위에 인용된 문장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아편이란 것의 속성을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알려주고, 그것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뒷부분은 간략하게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된 듯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작가의 반생을 담고 있는 산문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희곡이나 시, 소설에서 따온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해 때로는 휘몰아치듯 올라가기도 하고, 때에 따라 감정이 뚝 떨어져 서글픔을 느끼게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번역본을 읽으면서는 보를레르처럼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보르헤스의 말처럼 '가장 슬픈' 이야기라는 표현을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작가의 이야기에 대해 서글픈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 이 책이 초판본을 바탕으로 번역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책들은 개정판을 중심으로 변역본이 나오는데 그것은 왜일까. 개정판은 초판과 달리 앞부분의 이야기가 균형이 맞지 않을 만큼 덧붙여져 있다고 한다. 아편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계기에 대해 지나친 변명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개정판을 낼 무렵에는 아편이 금지되었기에 드 퀸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자기 변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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