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방의 기사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물론, 인간은 매일매일 일정 분량의 기억을 상실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들 중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몽땅 잃었을 경우라면? 자신의 이름도 살던 곳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 어른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들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은 좌절을 넘어 커다란 절망을 가져올 것이다.
한 남자가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서 눈을 뜨고 일어났다. 그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으며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를 떠올리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아무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이나 살던 곳 등 자신에 관한 기억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혼란스럽기만하다.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도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자는 주위를 돌아보며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만 단편적인 것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이리저리 방황하다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료코. 갈 곳도 없고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그는 료코에게 의지하게 된다.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던 그는 문득문득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혹시 결혼한 것은 아닐까, 아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다니던 중이 아닐까. 남자는 료코가 지어준 이시오카 게이치로란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지만 늘 마음 한구석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공장에 취직해 남들처럼 살아가게 된 이시오카는 미타라이 점성술학원이란 곳에 들르게 된 후, 이시오카는 마타라이와 금세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어떤 것이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미타라이에게는 모든 것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만사를 달관한 듯한 그의 태도가 마음을 편하게 해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후 우연히 료코의 서랍에서 발견한 자신의 운전면허증. 이시오카는 그 운전면허증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지만, 그건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아내와 아이는 죽었다. 이시오카는 혹시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닐까 하며 두려워하지만 아내가 남긴 일기장과 자신이 남긴 일기를 읽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하나둘씩 알아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한가지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전반부에서는 기억을 잃은 남자가 새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경위와 사랑하는 여자 료코와의 생활, 그리고 점성술학원을 운영하는 미타라이와 나누는 우정이 주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중반부는 이시카와가 아내의 일기와 자신의 일기를 읽으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된다. 처음에는 조금 지루한듯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과거는 여전히 모호하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내와 자신이 남긴 글뿐이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백지 상태의 뇌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이시카와에게 남겨지는 건 복수심 뿐인 것이다.
이 작품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또다른 반전을 준비한다. 거기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뭐랄까, 작가가 준비해 놓은 섬세한 플롯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느낌이랄까. 엉성하고 나사 하나쯤 빠진 듯한 미타라이가 멀쩡한 정신으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을 보면서 작가가 준비해 놓았던 복선을 그제서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이방의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기억을 잃은 사람이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몽땅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걱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라면 몰라도 혹시 범죄에 연루되거나 사람을 해친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그의 신경은 벼랑끝에 선 사람처럼 날카로워지리라. 또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작은 단서에도 집착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찾은 단서를 곧이 곧대로 믿을 수 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이상, 그것만이 자신과 과거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시카와가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고, 결국 참담한 진실과 마주쳤을 때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 만약 료코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미타라이가 옆에 없었다면 이시카와는 더욱 깊은 개미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잃고 온전한 이방의 세계에서 자신의 참담했던 과거와 조금씩 마주치게 된 이시카와와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미타라이의 만남은 어쩌면 서로의 파장이 맞았기에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석은 같은 극을 밀어내지만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결락감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보다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되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섬세한 심리묘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기억이란 것이 가지고 있는 모호함과 지배력이란 속성, 섬세한 복선과 정교한 플롯을 비롯해 점성술사라는 특이한 직업에 특이한 성격을 가진 탐정의 등장은 이 책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그들의 다른 이야기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