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에서 말하다 - 안토니오 시모네와 나눈 영화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안토니오 시모네 지음, 김난주 옮김 / 한길사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얼마전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에 다녀왔다. 한국 영화였는데, 사랑과 연애에 관한 이야기였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웃기며, 적당히 재미있는 영화였다. 엄마와 극장을 나오면서 둘이 나눈 대화는 "재미있네." , "응, 그러게." 가 전부였다. 거짓말 하나 안보탠 실화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함께 극장을 가본 게 얼마만이던가. 작년에 한번, 그전에는... 거의 십년전?
그러고 보니 아버지랑 극장에 가서 봤던 첫 영화가 생각난다. 벤허였다. 긴 러닝타임에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은 그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조차 하지 못할 나이였다. 그 영화를 보고 기억나는 장면은 마차 경주 장면이었다. 한바퀴를 돌 때마다 물고기 조각을 한마리씩 올리던가, 내리던가. 그때의 기억은 그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후에 벤허를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을 하곤 한다. (오해없으시길, 아버지는 지금도 곁에 계신다. 그저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처음 극장에 갔던 날이 유난히 생각에 오래 남아서이다.)
『로마에서 말하다』는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와 그의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가 나눈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들인 안토니오 시모네는 영화 감독을 꿈꾸는 사람으로 이 책이 씌어질 당시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영화판에 대한 지식이 깊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책 표지를 보면 총 네편의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와 있다. 왼쪽 위는 로미오와 줄리엣, 오른쪽 위는 스파이더맨, 왼쪽 아래는 사브리나, 오른쪽 아래는 시네마 천국이다. 모두 내가 재미있게 봤고 좋아하는 영화라 참 반갑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할을 맡은 올리비아 핫세는 내게 있어 영원한 줄리엣이다. 줄리엣하면 올리비아 핫세, 올리비아 핫세라고 하면 줄리엣. 나에게 다른 줄리엣은 필요없달까. 그리고 흑백영화라고 하면 오드리 햅번이다. 난 고전을 꽤 좋아해서 오드리 햅번이 등장하는 영화는 거의 다 봤고, 그중에서 로마의 휴일은 여러 번 봤다. (로마의 휴일을 좋아하는 팬들은 정말 많을 것이다) 이런, 표지 이야기만 하다가 날 새겠다.
본문은 총 31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340페이지의 분량인 것을 감안한다면, 각각의 꼭지에서 다루는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꼭지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다른 꼭지들과 연관되어 있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난 책을 읽으면서 총 네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이 책을 정리해 봤다.
이탈리아 영화 · 미국 영화 · 일본 영화 · 독일영화
시오노 나나미의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는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외국인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영화가 10편 소개되어 있는데, 그 형식은 네오리얼리즘, 희비극, 희극, 코스튬 대작등으로 나뉘어 지지만 그 속내용은 이탈리아라는 나라와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만들어진 영화가 많은데, 객관적이면서도 진실한 내용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영화에 관해서는 78회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상을 받은 <크래쉬>, <앙코르>, <카포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꼭지와 미국적인 영화를 소개하는 꼭지로 나뉘어 진다. 미국적인 영화로는 스파르타인들을 다룬 <300>이 거론되는데, 역사는 무시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성들의 전투란 것을 멋지게 잘 표현했다는 글이 참 재미있다. 그외의 미국적인 영화로는 <스팅>타입의 영화다. 이런 영화는 "질 좋은 악이 머리를 써서 질 나쁜 악을 섬멸한다"는 줄거리를 가진다. 악당이 악당을 쳐부시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악당이 있고 나쁜 악당이 존재한다. 이런 영화는 단순히 총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영화가 아니라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다. 촘촘한 복선이 깔린 영화랄까. 나도 이런 영화, 아주 좋아한다.
일본 영화는 큐트한 <훌라 걸스>, 퍼니한 <선거>, 그리고 리스펙트할 수 있는 <굿바이> 세편이 소개된다. 모두 일본 영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특히 선거의 경우에는 일본 선거 시스템과 이탈리아의 선거 시스템을 비교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 영화의 경우 <타인의 삶>이란 영화가 소개되어 있다. 공산국가 시절 다른 사람의 삶을 감시하던 한 남자의 이야기에 관한 내용인데, 무척 흥미로웠다. 언젠가 꼭 한 번 보고싶은 영화다.
그외의 영화 이야기중에는 다 식은 후에 제공되는 요리같은 복수를 다룬 복수 영화, 과거는 현재에도 반복될 것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과 안토니오 시모네가 정의하는 B급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토니오 시모네의 B급 영화에 대한 정의가 무척 흥미롭다. 첫째로 예술작품을 지향하지 않아 유명영화제에서는 절대로 상을 받지 못하는 영화들, 둘째로 평론가들에게는 무시당해도 관객 동원에는 성공하는 영화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B급 영화란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의 B급 영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그중 <람보>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는데, 나같은 경우 그저 액션영화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안에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병의 아픈 이야기가 숨어있었다고나 할까. 이런 부분들을 보면서 내가 영화를 볼 때 얼마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참, 잊지 마시길.
각 꼭지의 뒷부분에는 그 꼭지에서 거론된 영화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그 페이지들을 보면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도 즐거울 듯.
영화 감독들
이 책의 수많은 꼭지들 중 영화 감독과 그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총 9개이다. 엘레강스한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해지는 루키노 비스콘티, 시칠리아 출신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날카로운 아이러니와 인간성에 대한 조롱을 담은 영화를 만든 로버트 앨트먼, 카메라와 렌즈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명감독 스탠리 큐브릭,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영화로 담아낸 구로사와 아키라를 비롯해 시드니 루엣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비교 분석, 마틴 스콜세지, 시드니 폴락,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의 영화에 대한 철학과 그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영화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들 감독의 모든 작품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각 꼭지의 주제에 맞는 영화와 두 모자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낯선 영화도 많았고, 나는 좋아하는 영화인데 언급되지 않아 약간은 서운한 부분도 있었다.
여기에 거론되는 감독중 주세페 토르타토레 감독은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다수 만들었다. 자신이 시칠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 특히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을 맡은 <말레나>라는 작품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영화 배우들
영화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는 총 7개 꼭지에 등장한다. 첫 테이프는 감독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보여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로 시작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스트론조와 필리오 디 푸타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는 뒤에 나올 아이스 레이디 이야기와 비슷한 전개를 보여주는데 일단 스트론조와 필리오 디 푸타나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스토론조는 나쁜 남자, 육식남 이미지라고 할까. 숀 코너리가 그런 남자라니, 난 숀 코너리 참 좋아하는데 말이지. 내가 모르는 숀 코너리를 만난 느낌이었달까.
무드남, 초식남으로 여겨지는 필리오 디 푸타나는 앞서 언급된 마르첼로 마스트로 얀니, 조지 클루니 그리고 대니 드비토. 앞에 나온 둘은 이해가 되는데, 대니 드비토라구??? 나도 놀랐다. 하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달까.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아이스 레이디로 칭해지는 여성 배우들은 어떤 배우들일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여성들이다. 그 배우들로는 마돈나, 안젤리나 졸리, 조디 포스터. 이들은 사랑보다 일을 더 중시하는 내면이 차가운 여성들이라 묘사된다. 뭐, 사람 나름의 생각이긴 하겠지만, 난 이 말에 반쯤 동의한다. 근데 더 재미있는 것은 안토니오 시모네의 이들 여성에 대한 생각이다. 피곤한 여성 타입이라고 하던가. 하긴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쿨하고 멋지겠지만, 남자들 입장에서는 감당이 안되니 피곤하게 여겨질 수도.
이외에도 래퍼 출신 배우들, 요절한 배우들, 조연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래퍼 출신 배우들은 이 책에서 언급된 배우들 외에도 꽤 많다. 근데 이 책에서 언급된 배우가 아닌 아이스 큐브가 연기하는 것을 보면 문득 대사치는 것이 랩하고 있는 듯하달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어떨지...
요절한 배우들에 이름을 올린 배우들은 히스 레저, 리버 피닉스, 브래드 랜프로. 그들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이들을 압박해 죽음으로 몰고간 영화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브래드 랜프로는 누군가 했더니,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에 나왔던 배우였다.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주연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난 조연 배우들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배우들 중 채즈 팔민테리는 나도 무척 좋아하는 배우이다. 무척 강한 인상을 주는 배우라 조연으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기막히게 조연을 연기하는 배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조연 배우들이 주역 배우들 보다 연기를 더 능숙하게 한다고. 요즘 영화판은 90%이상이 그렇지 않을까?
영화판 뒷담화
안토니오 시모네는 영화 감독을 꿈꾸며 지금은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영화판의 이야기는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는데 이탈리아와 미국 영화 제작에 모두 참가한 경험이 있기에 두 나라 간의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그가 보는 미국 영화는 상업이고, 이탈리아는 예술을 지향한다. 두 나라는 영화 제작 준비기간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 미국은 2년, 이탈리아는 겨우 2달이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의 장점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두 나라의 장단점을 골고루 비교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시칠리아 섬에서 촬영을 할 때 마피아가 용역업체로 참가한다는 것이다. 마피아 이야기를 다뤄도 아무렇지도 않게 참가하는, 즉 돈만 되면 뭐든 하는 시칠리아 마피아의 철저한 현실주의적인 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게 이탈리아 영화판의 흥미로운 점이랄까.
이외에도 의상담당에서의 독보적인 존재인 밀레나 카로네로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작업을 해 왔던 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능력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인간적인 부분을 함께 다뤘다고나 할까.
로마에서 말하고, 한국에서 듣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영화계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와 안토니오 시모네가 관심을 가고 있는 영화 감독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 좋아하는 배우들과 그들이 출연한 영화, 그리고 영화 제작 현장의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감정이 담뿍 묻어나는 이야기들이다. 또한 비평가처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느끼는 바를 편안하게 풀어 놓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아들과 어머니 사이가 아니라면 이렇게 편안한 어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그래서 더 친근감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시오노 나나미의 인간의 삶에 대한 넓은 시각과 안토니오 시모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의 눈길이 합쳐져 탄생한『로마에서 말하다』는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도 재미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된 내용이 아니기에 책을 잡으면 한자리에서 다 읽어야 할 부담도 없다. 하지만, 내 장담하리라. 이 책을 읽다 보면 둘의 대화에 푹 빠져서 한자리에서 다 읽게 될 거란 것을.
사진 출처 : 책 표지
덧>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조금 어색한 부분 몇 가지에 대한 언급
본문 중에 '고급한 술'이나 '고급한 프로'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말로 보자면 꽤나 어색한 표현이다. 고급 술이나, 고급스러운 술 혹은 고급스러운 프로라는 표현이 우리말로 더 잘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표현은 일본어를 직역한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그리고 일본식 표현이 또 있다. 소녀만화란 것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순정만화라고 한다. 소녀만화를 주로 읽는 층은 여성들기에 소녀만화란 표현을 쓴다. 소녀가 등장한다고 소녀만화는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