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이란 것의 가장 큰 속성은 모호함이란 것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중에서 특별히 행복했고, 즐거웠고, 기분 좋았던 기억은 여러가지의 각색을 거쳐 추억이란 이름을 붙여 간직하게 되고, 그중에서 특별히 무서웠고, 두려웠고, 기분 나빴던 기억들은 단단한 상자 속에 넣어 마음 속 깊이 봉인하고 살기도 한다. 사실 내가 기억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 기억들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하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특히 유년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후의 기억들도 내 머리가 알아서 정리를 한 덕분에 사소한 것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살아온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뇌용량의 초과일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기억때문에 고통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각이란 기제는 때때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느 정도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기도 한다. 대부분 그것은 너무나 끔찍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일이다. 이는 자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끔찍한 일이라면 생존 본능이란 것이 발동하여 기억을 무의식중에 봉인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스스로 봉인을 한 것이지만 무의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의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듯 하다. 그럴 경우 결락된 기억에 대해 고통을 받는 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옛날에 죽은 집』은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기억이란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나'의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야카는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고 있는 문제로 고민이다. 사야카는 그 원인이 결락되어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과 관련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지언대, 사야카는 왜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것일까.  

사야카는 '나'와 함께 사야카의 아버지가 남긴 열쇠와 지도를 가지고 사야카의 기억이 묻혀 있을 만한 장소로 찾아가게 된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중에 서 있는 집. 그곳은 아주 묘한 곳이었다. 그곳의 시간은 23년전에 멈춰 버린 듯 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남겨진 채 사람들만 사라진 듯한 모습. 이는 마치 마야인들이 발전된 문명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정도로 그곳은 기묘하기만 하다. 게다가 현관문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고, 지하실을 통해서만 집으로 갈 수 있는 곳이라니. 집안 구조도, 집안의 물건도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 집에서 발견한 일기장과 편지를 토대로 '나'와 사야카는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하나씩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집에서 살았음이 분명한 미쿠리야 가족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은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가졌던 호기심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픔과 슬픔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초등학생인 유스케의 눈으로 본 가족사이기 때문에 더 그러했으리라. 행복하기만 해야 할 어린 시절에 닥쳐온 끔찍한 일. 작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보아온 어린 시절의 사야카는 자신의 기억을 본능적으로 의식 깊은 곳에 봉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이가 견디기에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절망의 벽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유로 성인이 된 사야카가 자신의 아이를 학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야카가 그 당시 얼마나 두려워했고, 절망했을 것이란 건 짐작이 된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가여울 수 밖에 없다. 사야카가 되찾은 기억이 현재의 자신을 더 큰 절망속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후의 사야카의 행동을 보건대 절망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듯 하다. 오히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더욱 강인한 여성이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는 있으리라.  

책 제목인『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 주는 느낌은 오컬트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부를 보면 전혀 오컬트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 역시 낡은 그 집에 죽어 있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죽은 내가, 그 집에서 줄곧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곳에 누워 있을 게 분명한 자신의 사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는 것일 뿐. (320p)

사람에게는 누구나 잊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자신의 머릿속에 봉인하는 대신 그 일이 일어났던 곳에 봉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우리가 벗어던진 기억이 매미 허물처럼 수없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탈피일 뿐, 완전한 새것은 아니기에 언제든 기회가 있다면 기억이란 것은 우리를 뒤에서 잡아채 넘어 뜨릴지도 모른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모른체 하고 있을 뿐.  

이 책은 집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삼고 있다. 가장 아늑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인 집. 바깥에서는 어떤 일을 당하고 들어와도 집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집이다. 그리고 내 가족이라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무슨 일을 당했든지 일단 감싸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졌을때 우리는 큰 절망과 아픔과 슬픔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고통의 기억이 과거를 살았던 사람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내가 옛날에 죽은 집』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그 힘을 현재에도 발휘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을 잡혀 살든지, 그것을 뿌리치고 극복하며 살아가든지의 선택은 당사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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