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 - 인류의 기원과 여성의 탄생
J. M. 애도배시오 외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난 대학시절 역사를 전공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는 역사학과를 여러가지 학과로 구분한 게 아니라서 사학과 하나만이 존재했다. 그렇다 보니 고고학, 인류학,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등등을 모두 공부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고고학과 인류학은 한국사나 동양사, 서양사와는 달리 개론 정도밖에 공부하지 못했다. 전공필수가 아니라 전공기초 과목이었달까.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무덤 양식의 변천사 정도다. 그렇다 보니 고고학이라 해도 한정된 기간내, 한정된 장소에 관한 것이 다였다. 재미는 있었지만, 깊은 지식을 얻을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인류학도 마찬가지로 개론정도만 공부한 것이라 나중에 틈틈히 문화인류학 서적을 읽곤 했지만, 아쉽게도 내게 확실한 지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기억하는 것 하나는 고고학과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주로 남성의 역사를 배웠다는 것이다. 물론 선사시대뿐만이 아니라 기록의 시대 역시 남성 중심의 역사이긴 했지만... 내가 배웠던 바로는 인류 사회의 진화는 3단계를 거쳤다. 첫째로 원시적인 난교 단계, 두번째로 모계 사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가부장제 사회. 대부분 이렇게 배웠을 것이다. 모계중심의 사회가 농경사회로 접어 들면서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그러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인류 역사 전반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에게 늘 종속되어온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사냥을 하면 여자들은 그것으로 음식이나 만들고 애나 낳았던 존재일까. 

사실 여자들이 선사시대에 결코 사소한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가 어렵기는 했다. 고고학이 다루는 기록이라는 것이 대개 정체를 알 수 없거나 이미 죽은 생물이거나 별다를 사실을 알아낼 수 없는 쪼가리에 불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 빙하기의 유물들은 대부분 돌과 뼈로 만들어졌다. 땅속에서 오랫동안 보존되는 물질들이다. 학자들은 주로 남자들이 돌과 뼈를 쪼개서 여러 가지 도구, 특히 뾰족하게 다듬은 던지는 무기들을 만들어 사용했을 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여자들이 사용했을 거라고 간주된 물건들은 식물성이었으므로 오래 보존되지 않았다. […] 따라서 주로 남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고학자들이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들만을 발굴해서 홍적세와 그 이전의 세계가 남자들의 세상이라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여자들은 대체로 무시되었다. (40~41p) 

선사시대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다. 그렇다 보니 남겨진 유물로 그 시대상을 추측하고 가설을 세울수 밖에 없다. 그럼, 잘 보존되는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주로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돌로 만들어진 것들이 그러한 것들이 될 것이다. 돌로 만들어진 무기류는 남성들이 발명하고 남성들만이 사용했을 거란 편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벽화에 남겨진 그림들은 그 생각을 부추긴다. 매머드를 둘러싸고 집단 사냥을 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남자들의 로망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은가. 이런 편견과 선입관이 선사시대의 여성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고 깔아 뭉갠 것은 아닐까. 남성들이 중심인 고고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남겨진 것만으로 추론하는 가설일 뿐이다.

일부일처제란 남자가 소중한 고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배우자(월경, 수유, 임신 등으로 항상 빈혈에 걸리기 직전이다)와 한두 명의 자식에게 나눠주는 대가로 항상 섹스를 할 수 있는 상대를 확보하고 자식들이 틀림없이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제도다. 사람들은 일단 석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뒤에는 사회적으로 이런 제도가 자리잡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석기는 사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도구이고, 사냥은 틀림없이 남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리가 완성되자 남녀의 역할도 그대로 결정되었다. (101p)

사냥을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에 입각한 것일까. 물론 여성들이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남자들처럼 며칠씩 거주지를 떠나지 못한다. 하지만 남자들이 없을 때 여자들과 아이들은 어떻게 했을까. 여성들 역시 작은 동물이나 물고기는 사냥을 했을 것이다. 남자들만 기다리며 손가락을 빨다가는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여전사들이라 칭해지는 아마조네스들은 스스로 사냥을 한다. 물론 이들이 직접 사냥을 해야만 하는 것은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이기 때문이지만,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다고 해서 남성만 사냥에 나섰다고 주장하는 건 좀 얄팍한 근거가 아닐까.

이 책은 이제까지 논외가 되어 왔던 선사 시대 여성들의 역할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물론 이 역시 추론이고 가설일 수 밖에는 없지만, 상당히 근거있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남성은 사냥을 해서 여자와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돌보고 음식을 만들었다는 현대의 남성상과 여성상을 대입하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창과 돌도끼만으로 거대한 매머드를 사냥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 당시 몇명의 구성원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는지는 몰라도 매머드 사냥만으로 충분한 고기와 가죽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다. 매머드같은 경우에는 정말 특별하게 사냥할 수 있었던 동물이고, 평소에는 작은 포유류, 물고기, 조개, 열매 등으로 식량을 충당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그러한 것은 여성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건 적당하지 않을 비유인지는 몰라도 사자의 무리는 암사자들이 사냥을 하고 숫사자는 영역을 지키는 일에 매진한다. 사자들은 길고 날카로운 발톱,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소같은 커다란 사냥감을 사냥하기 쉽지 않다. 사자도 그러할 진대 고작 돌도끼와 창같은 무기로만 무장한 선사시대인들이 매머드 사냥을 쉽게 했으리란 생각은 절대 못하겠다. 오히려 다른 동물이 사냥한 사냥감의 찌꺼기를 얻거나 우연히 죽은 사체를 발견해서 매머드의 고기를 얻었다고 하는 편이 더 진실해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남자들의 사냥만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가설은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남자들이 혹가다가 사냥해온 고기는 특별식이었고, 나머지는 여성들이 채집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남성 중심의 사회가 이때 벌써 존재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또한 여성들이 손놓고 앉아서 남자들의 덕을 보려했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다. 이렇다고 해서 여성 중심의 사회였을거란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별로 없이 서로를 도와가며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각자의 역할에 잘 맞는 일을 배분했을 뿐, 남자일 여자일은 따로 없었을 거란 생각이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남자들이 사냥을 떠난 동안 여자들은 그곳에 남아 다양한 생필품을 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완전 정착이 아닌 상태이었다 해도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사냥으로 자주 밖으로 나가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잘하지 않았을까. 이는 정착 생활을 하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곡식을 심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다면 그에 필요한 것들은 여성들이 더 잘 찾아내고 더 잘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말도 있듯이. 

지금까지 우리는 남성중심의 역사관으로 선사시대를 바라봤다. 하지만, 남겨진 유물이 거의 없다고 해서 여성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여성들의 손에 의해 탄생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보여진다. 이는 여성이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것과는 다르다. 당시에는 생존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일이라면 누구든 나서서 발명했을 것이므로. 

아직도 이런 남성중심의 역사관이 고고학계나 역사학계 전반에 걸쳐 중요하게 생각되어지고 있지만, 여성 고고학자들의 증가와 그들의 연구는 선사시대의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대해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제시해오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인데다가, 유물이나 유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감춰져있던 선사시대의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가설이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분야에 있어 상당히 많은 연구가 진행되겠지만 고고학 연구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완벽한 결론은 없을 것이고, 완벽히 증명할 가설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그 시대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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