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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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카스테라를 참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종종 만들어 주셨던 카스테라는 따끈하고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했다. 엄마가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시는 날이면, 나도 열심히 옆에서 달걀 흰자 거품을 내는 데에 동참했고, 카스테라가 동그란 전기 오븐안에서 구워지는 동안 코를 열심히 킁킁거리며 언제 겉면이 먹음직스런 갈색으로 변하는지, 분단위로 확인하곤 했다. 그렇게 구워진 카스테라는, 엄마의 맛이었다. 이제 난 어디서도 그렇게 맛있는 카스테라를 찾을 수 없다.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는 어떤 맛일까. 왠지 작가를 생각하면 새콤한 카스테라나 톡톡 과자처럼 입안에서 튀어오르는 카스테라가 연상된다. 이건 나만 그런 걸까. 하긴 이제껏 작가의 작품은 데뷔작인『지구영웅전설』단 한작품만 읽었으니, 생각의 한계에 부딪힌 것인지도. 그럴 경우 마음을 비우고 책을 읽는 게 좋다. 그리고 난 그렇게 했다.

첫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카스테라>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이다. 불쾌할 정도로 외로운 그는 중고가전센터에서 산 냉장고와 함께 살고 있다. 처음엔 거대한 소리에 질려하지만 어느새 그것에 익숙해져서 냉장고에 인격마저 부여한다. 그는 냉장고의 올바른 효용에 대해 찾다가 냉장고에 이것저것 집어 넣기 시작한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듯이. 처음엔 책, 그다음엔 아버지, 어머니, 학교, 동사무소, 미국, 그리고 중국 등등등. 그에게 있어 냉장고에 넣지 못할 것이 없다. 그렇게 이것저것 넣던 어느 날 냉장고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새 냉장고는 텅비어 있었고, 그곳엔 따뜻한 카스테라 한 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냉장고는 부패를 지연시켜주는 가전제품이다. 그는 어떤 것을 부패하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아니면... 그냥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세상의 모든 것? 사실 나도 가끔은 내가 싫어하는 것만 상자에 넣어 봉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여의치 못하니까 기억의 저장소에서 아주 깊은 곳에 집어 넣어버리거나 봉인해버리지만. 이 소설의 '나'도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외부에 대해 스스로가 취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는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아주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 나오는 나는 인턴사원이다. 총 8명의 인턴사원 중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는 것은 단 한명. 죽자고 애를 써도 합격은 불투명하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는 패기도 있고 용기도 있었는데, 군대를 다녀온 후 그는 세상에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예전처럼 튀는 존재로는 이 세상을 살기 힘들다는 건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중학교 시절까지는 좀 놀았던 '나'가 어느 순간을 계기로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깨달은 후 자신만의 산수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너무나도 일찍 깨달았달까. 그는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알고 스스로 돈을 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지하철 푸시맨, 주유소 직원 등등. 세상에는 돈이 많아 수학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돈이 없어 산수만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산수 인생은 아무리 바르작거려도 수학 인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 나름의 산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우리 대부분은 산수 인생이 아니던가.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는 세상에 흥미가 별로 없는 나와 듀란의 모험기이다. 둘이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은 어땠을까. 우주선 (이 아니고) 우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연상하면 SF인가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난 이 둘이 본 것처럼 지구가 개복치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긴 싫다. 사람들이 저지른 환경파괴로 다시 빙하기가 찾아오면 지구가 개복치처럼 은빛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난 당장은 아름다운 푸른 지구를 믿으면서 살란다.

<아, 하세요 펠리컨>은 일흔 두군데의 면접에서 실패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 청년과 다 쓰러져가는 유원지를 운영하는 사장님의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저수지의 오리배 유원지. 그곳에는 제대로 작동하는 건 없다. 낡을대로 낡은 오리배와 굳이 그곳을 찾아오는 세상의 패배자들이 가득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심하게 불어오던 날 오리배들이 떼거지로 나타난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는 보트 피플.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더이상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그들은 희망을 찾아 오리배를 타고 퐁당퐁당거리면서 세계로 뻗어나간다. 하지만 오리배는 오리배일뿐, 모터 보트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물위에 뜨기 위해서 열심히 발을 휘젓는 백조처럼 우리도 조금씩이나마 세상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오리배위에서 열심히 발을 굴리는 오리배 승선자들은 아닌지...

<야구르트 아줌마>는 농담경제학 사전을 읽고 있는 나의 이야기이다. 도도새의 멸종을 자유시장 경제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약소국에 비유해 놓고 있다. 말만 그럴듯한 자유시장경제. 그 시스템은 있는 자의 배만 불리고 있는 자의 곳간만 채운다. 그 시스템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도 그 시스템은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럼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코리언 스탠더즈>는 386세대였던 운동권 선후배 사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대에는 날렸던 인물인 기하형은 지금은 작은 농촌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와 함께 운동을 했던 동지들은 정치니 뭐니 해서 지금은 모두 한가닥을 하지만 기하형은 그 시절의 눈부신 모습을 잃고 농촌에서 혼자 끙끙거린다. 지원해주던 사람들도 이젠 없다. 정부의 시책은 조변석개이고, 손대는 것마다 실패하고 만다. 이상은 높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누군가 그의 피를 말려 죽일 생각인 모양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대왕오징어의 기습>은 어쩌면 우리 미래에 닥쳐올 모습일지도 모르지. 수천번의 원폭 실험이 가해진 바다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니까. 인간들은 혼자 똑똑한 척 하면서 미래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헤드락>은 미국유학중이던 한 학생이 갑자기 나타난 헐크 호간에게 헤드락을 당한 후 달라진 그의 삶에 대해 보여준다. 세상은 헤드락을 거는 자와 헤드락에 걸리는 자, 두 부류로 나뉜다. 헤드락에 걸려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헤드락에 걸렸을 때 반격을 할 수 있는 백드롭을 배우거나, 자신이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헤드락을 걸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은 힘 있는 자의 편이니까.

<갑을고시원체류기>는 친구집에서 기숙하던 한 삼류대학생이 고시원에 살게 되면서 보고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얹혀 사는 것도 적당한 때 그만둬야 한다. 어차피 친구집이지, 내 집은 아니니까. 겨우 몸하나 누일 수 있는 고시원.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 나름의 룰을 가지고. 그가 아주 오랜후에 그 고시원을 떠올리며 했던 생각이 가슴에 와닿았다. 실패했거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몸을 뉘이게 해 줄 그런 곳이 필요하다는. 비록 웅크린채라도. 마음만은 편안할 테니까.

뭐랄까. 총 10편의 단편들의 이야기는 이리 튀고, 저리 튀어 갈피를 잡기 힘들다. 어떨땐 SF같기도 하고, 어떨땐 판타지같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속알맹이는 지극히 현실적이랄까. 세상과 잘 교류하지 못하는 사람, 취업때문에 맘고생하는 사람, 가족관계때문에 맘고생하는 사람, 세상의 모든 일에 흥미를 잃은 사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 등 여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들이다. 아무리 바르작거리고 애를 써도 그들은 태생부터 남다른 누군가를 쫓아갈 수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운명은 그렇게 그들을 속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순응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벽은 너무 높고 차갑다. 벽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우리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서글프고 고달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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