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 바라다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티비에서 범죄 드라마를 볼 때 문득 문득 느껴지던 것은, 수사관들은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들은 주변의 배려와 이해 속에 따스하게 감싸지지만, 수사관들은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욕이나 얻어 먹는다. 때론 우습게도 가해자인 범인을 두둔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사람도 나오기도 한다. 참혹한 범죄 현장을 마주해야 하고, 괴물같은 심리를 가진 범인들을 잡아 들이는 그들, 그들을 보면 용케 제정신으로 그 일을 계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의 범죄는 점점 더 잔혹해져가고, 수법은 치밀해진다. 별 것 아닌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 마음은 오죽할까.

센도 타카시 형사는 지금 요양중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담당했던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 원인이 되었다. 자신이 조금만 영특하게 굴었다면 피해자는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고, 범인 역시 눈앞에서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정신을 파고 들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형사도 인간인지라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그는 그 일에서 쉽게 회복되지 못하고 상담 치료를 받으며 복귀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런 센도 형사가 복직을 준비하면서 쉬는 동안 의뢰받은 사건 6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연작 소설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배척 -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삿포로에서 약 세시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그곳은 오지(오스트레일리아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이주를 달가워했던 마을 사람들도 오지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오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된다. 다른 문화와 생활 습관, 언어의 장벽등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배척하는 데에 큰 이유가 되었다. 원래 작고 고립된 마을이란 그렇지 않던가. 오지 사람들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중 발생한 살인 사건. 경찰과 마을 주민들은 모두 오지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인데...

고립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외부인과 현지인들의 감정 싸움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 단편에서 센도는 외부인의 시각으로 편견과 선입관에서 벗어나 사건을 바라본다. 사건의 동기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둔 그가 내린 결론은?

범인의 상처 - 폐허에 바라다

어느 날, 13년 전 삿포로에서 일어난 창녀 살인 사건과 비슷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그후 센도 형사는 13년전 발생한 창녀 살해 사건의 범인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는 십대 초반에도 창녀를 살해한 전과 2범. 그러나 상해치사 혐의로 12년의 징역 생활을 끝내고 출소했다. 그는 자신이 자란 폐탄광촌으로 센도를 부른다. 정황상 그가 범인이라는 확신이 들긴 하지만, 그는 왜 센도를 폐탄광촌으로 불러낸 것일까.

사건의 범인인 후루카와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몰락해가는 탄광촌에서 싱글맘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파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자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까지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후 그 어머니마저 없어지고, 동생도 죽고 후루카와는 혼자 살아가야 했다. 창녀을 죽였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살인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루카와가 어떤 고통을 받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달까. 그는 재판장에서 발가벗겨졌다. 검찰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애썼고, 변호인은 그의 상처를 낱낱이 파헤쳐 판사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 후루카와는 결국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

비밀 - 오빠 마음

홋카이도의 한 어촌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피의자는 그 사건에 대해 모든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이 왜 칼을 들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센도는 그 사건에 대해 주변 탐문을 하면서 뭔가 불투명한 막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지키려 했던 한 청년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오는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촌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권 다툼같은 문제도 접할 수 있었다.  

아츠타 - 사라진 딸

여성을 납치, 감금한 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도주중 어이없게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가 죽인 두 사람의 시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단편은 끔찍한 현대 사회의 범죄를 다루는 한편,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집안의 가장으로 군림하던 아버지와 가출한 후 퇴폐업소에서 일하던 딸.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의 가족들은 에전만큼의 유대감을 가지지 못한다. 딸을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달은 아버지의 후회 섞인 탄식이 귓가에서 맴도는 듯 하다.

이 사건의 범인은 연예인 지망생으로 결국 연예인이 되지 못하고 반쯤은 히키코모리처럼 생활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처음에는 불법주거침입으로 시작해 결국 살해까지 범죄수위를 높여가는 이 청년을 보면서 현대 사회의 범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증오 - 바쿠로자와의 살인

17년전 살인 사건의 용의자였던 목장주가 살해된 채 발견된다. 집안에서 살해된 남자. 법인은 가족인가, 아니면... 경주말을 육성하는 아버지는 아들들을 말을 조련하고 사육하듯이 키웠다. 그렇게 억압받으며 큰 아들들은 사사건건 아버지와 대립해 왔다. 큰 아들의 경우 사냥총을 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한 적도 있을 정도다. 뿌리 깊은 증오, 그리고 피해자의 과거 행적. 모든 것을 인과응보라 하기엔 너무나도 잔혹한 죽음이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증오한다, 라. 사실 내게 있어 그런 감정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일을 겪어 왔기에 자신의 피붙이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게 되는 것일까. 요즘 들어 존비속살해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때로는 증오때문에 때로는 돈때문에. 우리 사회는 더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도덕이나 윤리가 추락해버린 것일까. 

악의 - 복귀하는 아침

호텔 재벌가의 한 여성이 자신의 동생의 혐의를 풀어달라며 센도에게 의뢰해온다. 그녀의 여동생은 한 여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수사를 진행하면 진행할 수록 묘한 곳으로 자꾸만 빠지게 된다. 과연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6편의 단편중 가장 끔찍했던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악의가 이토록 깊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증오하길래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중산계급 이상의 부유한 삶을 누려온 사람들, 그러하기에 소유욕과 집착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것일까. 그것에 대한 집착때문에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6편의 작품중 첫번째 단편인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족 붕괴와 관련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편모 가정에서 불우하게 자란 청년은 어머니를 증오하는 마음으로 창녀를 죽이고, 동생을 지키기 위한 오빠의 희생이 정당하게 여겨지고,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채 헤어지고 만다. 또한 평생 아버지를 증오해오면서 살아온 아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것에 대한 독점욕과 소유욕때문에 피붙이를 함정으로 몰아 넣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단편들은 현대 가정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총망라해서 보여주는 듯 하다. 가장 믿을 수 있고 의지가 되는 가족이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건 억장이 무너질만큼 가슴 아프고 참혹하다.

이와 더불어 이 작품들은 현대 사회가 양산해 낸 범죄를 비롯해 경찰의 과잉수사나 범인 만들기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으로 범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는 시도와 범인의 입장을 배려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또한 사건의 충격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센도에 대해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형사들의 마음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같은 수사관들일 뿐, 일반인들은 센도에게 의지하려고만 하지 그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경찰이 직업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느껴버리는 것일까.

센도는 여섯가지의 사건의 수사를 도우면서 스스로를 치유해나간다. 치유는 스스로의 몫이지만,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같은 수사관이 아닌, 다른 사람도 수사관의 마음을 헤야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도움은 될 수 없어도, 그들의 찢기고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려 주는 건... 우리들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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