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음의 무도 - 왜 우리는 호러 문화에 열광하는가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했다. 전설의 고향을 처음 볼때는 바들바들 떨면서 이불 속에 숨어서 봤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는 동생과 함께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도 되었다. 내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는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 중 하나는 '내 다리 내놔라~'하고 한다리로 펄쩍펄쩍 뛰어오는 귀신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다가 푸하하핫하고 웃고 말았다. 다리 분장이 내가 봐도 너무 엉성했기 때문이다. 종아리 부분을 뒤로 올리고 묶은 게 분명해 보였다. 무서워야 할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다니, 그건 내가 간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분장이 어설펐기 때문이란 것을 일단 말해 둔다.
난 겁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 보통 여자들과 비교해 보자면 - 그래도 무섬은 좀 타는 편이다. 물론 혼자서 공포 영화를 보러 가고, 공포 소설은 일부러 밤에만 보는 취향을 가지고 있긴 해도,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다. 무섭지 않으면 왜 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무척이나 매운 낙지 볶음이나 떡볶이를 맵다고 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처럼 공포 장르 역시 무서운데도 계속 보게 된다. 물론 이제는 그냥 허접한 분장을 한 귀신이나 유령, 괴물같은 것에는 예전처럼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오히려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둠이란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달까.
처음으로 공포 문학이나 공포 영화를 보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초등학교때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으면서 푹 빠져들었다는 건 기억이 난다. 그때는 주로 공포 문학과 추리 소설을 읽었는데 - 물론 어린이 명작동화나 위인전도 열심히 읽었다 - 공포 장르를 주로 접한 것은 역시 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포 드라마나 영화는 대부분 밤에 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교적 티비 시청이나 비디오 시청이 자유로워진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으니까. 그때 읽었던 공포 이야기는 고전 소설외에도 무슨무슨 공포이야기 등등등 하면서 나온 소설류였다. (지금은 책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무서워하면서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펄프 소설류가 아니었을지...)
공포 소설은 익숙한 것들 속에 도사린 차가운 손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전혀 지나친 처사가 아니다. 좋은 공포 소설은 이러한 차가운 손길에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압력을 실어 행사한다. 가정에 돌아와 문의 빗장을 걸어 잠글 때, 우리는 걱정 근심을 밖에다 내쫓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쁜 장소에 관한 좋은 공포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만사를 밖에다 내쫓고 있는 게 아니라고 속삭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집 안에 가둬두고 있는 거라고 ……. '그것들'과 함께 남게 되는 것이라고 속삭인다. (450p)
공포 소설을 읽으면서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것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우리 일상이 가져오는 '무언가'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언급한 책 중『옆집』과『힐 하우스의 유령』같은 경우 집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 가장 안락하고 안정적이여야 할 것이 분명한 집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의 경우 우리나라의 전설의 고향을 매년 봤고, 그후에 봤던 M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외에도 다양한 티비 드라마가 있었지만 역시 <M>이 가장 무서웠다. 아마도 지금보면 특수효과같지도 않은 특수효과라며 쓴웃음을 짓겠지만, 이런 건 아무래도 상대평가가 어울린다. 그 당시에 가장 무서웠던 것이니까. 요즘은 케이블 티비에서 공포 이야기나 공포 드라마를 자주 제작해서 보여주지만 아무래도 선정적인 것이 많아서 - 야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피가 튀고 살이 튀는 그런 것들 - 그다지 흥미를 못느끼고 있다. 외화로 기억이 나는 건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역시 <제 3의 눈>과 <환상특급>이다. 이건 꽤나 밤늦게 해서 부모님 눈치를 보면서 시청했던 기억이 난다. 그후엔 <엑스 파일>에 푹 빠졌고. 엑스 파일을 공포라고 해도 되나? 뭐, 내 생각에는 그렇다.
라디오 방송은 기억나는 것이라곤 제 5공화국 뭐 이런 거 밖에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납량특집이라고 해서 드라마처럼 꾸민 이야기가 등장하곤 했는데, 확실히 귀로만 듣는 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무섭달까. 그런 점에서 스티븐 킹이 이 책에서 1950년대의 사람들이 라디오 방송을 듣고 우주인이 지구를 침략했다고 생각해서 피난을 나섰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눈으로 보이는 영화의 경우 영화를 자주 보다 보면 언제쯤 뭐가 나올까를 예상할 수 있지만, 라디오는 절대적으로 예상불가능이라고 할까. 그런 면에서 귀로 듣는 이야기는 훨씬 더 무서운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공포 영화의 경우 중학교때 봤던 <플라이>가 먼저 떠오른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웩' 장르다. 공간이동을 실험하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내가 무서웠던 것은 뒤집힌 원숭이가 아니라 파리로 점점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특히 우웩하고 싶었던 장면은 남자가 입에서 액체를 토해내 다른 인간의 다리를 녹이는 장면과 파리 인간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어마어마하게 큰 구더기를 출산하는 장면이었달까. 지금도 우웩이다. 공간이동기구라는 과학적 소재를 차용하고 있지만 이는 엄연히 공포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건 중학교때 학교차원에서 단체 관람을 했던 영화인데, 왜 이런 19금 영화를 중학생에게 단체관람을 시켰는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도 그 영화를 보지 않고 우리를 데려갔었나? (笑)
그후엔 지금도 유명한 나이트메어 시리즈, 13일의 금요일 시리즈, 할로윈, 헬레이저 시리즈(오, 핀헤드. 내가 너무 좋아하는) 등등 하드 고어라도 불러도 될 영화들을 주로 봤다. 뭐 스플래터라고 해도 좋고, 슬래셔 장르라도 해도 좋다. 피가 튀고 살이 튀는 그런 영화들. 우리 아부지 왈, 이런 영화는 사람 죽이는 방법을 논하는 영화라고, 어떻게 하면 가장 잔인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뭐, 어떤 면에서 보면 그런 점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근데 그런 영화를 계속 보면 어느 순간 질린다. 자꾸 보면 똑같은 패턴으로 돌아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가끔 반전이 나와주긴 하지만. 그후엔 스크림 시리즈나 난 네가 지난 여름에 ~~ 등등등의 캠퍼스 레전드류의 영화를 봤다. 시리즈물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역시 데스티네이션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 창조된 괴물이든 인간의 마음속 어둠이 만들어낸 괴물이든 간에 당시엔 무척 흥미로웠고 즐겨 봤었다. 하지만 이런 영화도 슬슬 물리기 시작해서 - 그렇다고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거나 새로운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가 나오면 흥미가 생긴다 - 그다음으로 넘어간 것은 심리 스릴러나 서스펜스류였다.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장면은 없어도 무척 잔혹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스멀스멀 등을 타고 오는 공포랄까. 그런 점이 좋아서 푹 빠져들게 되었다.
공포 영화가 가장 빈번하게 제공하는 예술적 가치는 우리의 환상적 두려움들과 우리의 현실적 두려움들 사이에서 연결점을 형성시키는 능력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50p)
이제 공포영화에 관한 최후의 진실이 있다. 누군가 언급했던 것만큼 공포 영화는 죽음을 사랑하지 않는다. 공포 영화는 삶을 사랑한다. 공포 영화는 기형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기형을 강조함으로써 건강과 활력에 대해 노래한다. 우리에게 저주받은 자들의 비참함을 보여줌으로써, 공포 영화는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아주 작은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은) 기쁨들을 우리가 재발견하도록 도와준다. (351~352p)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잔혹한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고 잔인한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다. 때로 티비 뉴스 같은 것에서 공포 영화나 잔혹한 게임을 하고 나서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떠드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건 아마도... 정신과 의사들이 그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이유를 확실하게 밝히지 못해서 공포 장르에 덤터기를 씌우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자주 했었다.
난 공포 영화나 건 샷 게임(총쏘기 게임)을 즐기지만 사람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영화는 영화, 게임은 게임, 현실은 현실이라고 할까. 공포란 장르를 즐기는 사람의 대부분은 정신이 건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즐기고, 그후 시원한 기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렇다고 사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를 악취미는 내게 없다. 다만 그것이 영화이고 이야기란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응분의 댓가를 지게 되는 것을 알기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아무런 댓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난 공포 장르를 보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죄를 짓고도 교묘하게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공포영화는 대부분 죄를 지은 자에게 응분의 댓가를 내린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안도하게 된달까. 또한 내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 그런 것에 안도한다. 그런 셈이다.
괴물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모두의 내면에 거주하는 잘 차려입는 정장 차림의 보수적인 공화당원에게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물스러움이라는 개념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열망하는 질서의 재확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이렇게 제안하련다. 본질적으로 괴물스러움이 우리를 무섭게 하는 것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 비정상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비정상들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듯한 질서의 결핍 때문이다. (114p)
우리가 유령을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가 늑대 인간을 무서워하는 것과 무척 흡사한 이유에서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부분은 아폴로적인 하찮은 제한들이 구속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깊은 부분은 벽을 뚫고 걸어 다닐 수도 있고,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 있고,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로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디오니소스적인 부분이다. ……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437p)
스티븐 킹은 공포 장르에 등장하는 중심적 존재들 - 이게 큰 가지가 되고 여기에서 세부적인 가지가 뻗어나간다 - 을 세가지로 규명했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그리고 이름없는 괴물. 뱀파이어는 흡혈을 한다는 의미에서 식육을 하는 좀비와 상통하는 맥이 있다. 늑대인간은 달이 뜨면 인간에서 괴물이 되기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언제든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이름없는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서 뻗어 나가는데, 이는 창조된 괴물들로 보면 좋을 듯 하다. 그는 공포란 장르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창조되었지만 그 뿌리는 이 세가지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 부분을 읽으니 아, 그렇구나 하는 수긍이 갔달까. 많은 변형이 이루어져 근본이 보이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난 뱀파이어에 매혹되고 비틀비틀 걸어다니는 좀비에 열광한다. 사람의 피를 빨고 살을 뜯어먹는 그런 존재들에게 왜 매혹될까. 그것은 114p에 나오는 설명을 보면 수긍이 가게 된다. (그전까진 내가 이런 존재를 좋아하는 것이 내 마음속의 변태기질(?)때문이 아닐까 고민했다) 물론 내 눈앞에 뱀파이어나 좀비가 떡 하고 나타나면 난 도망가기에 바쁠테지만, 어쨌거나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의 일부 뱀파이어 이야기는 작가의 로망을 쓴 듯한 이야기가 많아 너무 가볍고, 어떤 좀비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좀비로서의 매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서 고전이 좋은지도. 하여간 이런 존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령이 무서운 이유는... 그렇다. 사람 모습을 하고 있잖아! 사람의 마음속 어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사람이 무서운 이유와 일맥상통한달까.
공포 이야기의 주된 목적은 금기의 땅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갔던 사람들에게 어떤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규범의 미덕을 재확인시키는 데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려고 나는 노력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공포 이야기들이 가지는 틀 속에서, 우리는 엄격한 청교도 신자를 미소 짓게 할 만큼 무척 강력한 도덕 법칙을 발견한다. (645p)
스티븐 킹은 이 책에서 공포란 장르가 가진 장점 - 공포 장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절대 모를 - 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공포 영화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금기를 깬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인과응보라느니, 그것 참 싸다, 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바보같이 왜 그랬어, 라고 안쓰러워하게 된다. 그러면서 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포 장르란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겉모습은 괴물과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우리 주변의 익숙한 것들이 어떤 장치를 뒤집어 쓰고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SF장르처럼 보이지만 공포물인 경우 우주 개발에 대한 두려움이나 방사능 물질에 대한 두려움 등이 만들어낸 공포이며, 유령이나 늑대인간의 경우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어둠 - 이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 디오니소스적인 부분- 을 의미한다. 또한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친하게 지내야 할 이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일그러진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1950년에서 1980년에 이르는 시기의 공포란 장르를 서브 카테고리로 나뉘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옛날 것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요즘 정서에 맞겠어? 라는. 하지만, 공포물이란 것은 겉옷만을 갈아 입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약 30년전에 씌어졌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며,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점에 있을 것이다.
덧> 책 뒤에 수록된 공포 소설과 공포 영화 리스트. 이건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데 역자께서 조금 더 친절을 베풀어 한글로 번역해주셨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개된 책이나 영화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입수불가능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번역되어 나오면서 상당히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이 많은 것을 감안한다면 영어 제목만 봐서는 뭐가 뭔지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덧2> 책 제목인 죽음의 무도. 이것을 보고 김연아 선수를 떠올리신 분도 있을 것이고,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라면 리스트나 생상스의 음악을 떠올리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난 코넬 울리치의 춤추는 탐정이 먼저 떠올랐다. 제목은 연관이 별로 없어 보여도 책 내용은 '죽음의 무도'를 떠올리게 한다. 아실 분은 다 아실듯. 뭐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