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속임 그림 - 트롱프뢰유, 실재를 흉내 내고 관객을 속이다
이연식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몇달 전에 트릭 아트전이란 전시회가 있었다. 지방에 살다 보니 당시에 열렸던 전시회 중 하나를 선택해서 봐야 했기 때문에 트릭 아트전은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트릭이 숨어 있는 그림이 도대체 어떤 그림인지 나중에 다른 블로거들의 사진을 보며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뒤늦은 아쉬움도 함께.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속임 그림이란 말이 왠지 트릭 아트란 말과 통하는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눈속임 그림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M.C. 에셔다. 물론 에셔의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판화이긴 하지만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되는지... 에셔의 판화를 보면 눈이 즐겁기도 하지만 어지럽기도 했다. 그런 그림도 여기에서 소개된 트롱포뢰유에 속하는가 싶었는데, 그런 눈을 어지럽히는 그림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서 소개된 그림들은 가짜이지만 실제처럼 보이도록 관객의 눈을 속이는 그림이다. 또한 하이퍼리얼리즘 그림처럼 실제를 꼭 빼닯은 그림도 제외된다. 하이퍼리얼리즘 작품들은 사진처럼 보이길 원하는 그림이고, 관객을 속이려는 의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소개되는 트롱프뢰유는 어떤 그림들일까.


위의 그림을 보자. 이 작품은 얀 판 데르 파르트의「바이올린」이란 작품이다. 난 왼쪽 그림을 봤을 때 저 문을 통해 바이올린이 걸린 문까지 저벅저벅 걸어들어 가고 싶었달까. 왠지 만져질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이렇듯 관객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려진 것이 실재 사물인양 하는 것이 바로 트롱프뢰유이다. 이 책은 총 7개 파트로 나누어 트롱프뢰유의 다양한 수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뭐, 이런 악취미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죽은 동물의 그림을, 그것도 벽에 매달린 죽은 동물의 그림을 그리는 거지,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 왼쪽 그림은 1764년, 오른쪽 그림은 1504년에 그려졌다 - 를 생각해 보면 묘하게 납득이 간다. 요즘 사람들이 자신이 사냥한 동물의 사진을 찍어 보관하듯 이 시대에는 이렇게 그림으로 보관했던 것이다. 또한 요즘처럼 먹을 것이 흔한 시대가 아니였기에 이 그림을 통해 근사한 저녁만찬을 떠올렸을지도 모를일이다.

<산 것과 죽은 것> 장에 소개된 그림들은 저런 사냥물과 구겨진 종이가 특징적이다. 왼쪽 그림은 그림이 다 보이지 않아 구겨진 종이가 어디 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책 중간 부분에 있는 것이 종이이다. 이 구겨진 종이는 재미있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냥물이 그림이라면 구겨진 종이는 실재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걸 보고 실재라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몇 백년전에 그려진 그림이 실재를 대신할 정도가 될 것이란 것은 쉬 짐작이 간다. 막 사냥한 사냥감을 벽에 걸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트롱프뢰유의 두번째 이야기는 레터 택이다. 일명 <편지 꽂이 그림>이라고 하는 이 장르는 사물에 반사된 화가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편지 꽂이 그림은 편지나 문서들이 꽂혀 있는 그림도 있지만, 이 그림의 경우 작가가 사용한 물건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그림은 같은 작가의 그림이다. 사뮈엘 판 호호스트라텐이라는 작가가 그린 이 그림들은 그려진 시기에 2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는데, 2년동안 상당히 정교한 그림으로 바뀌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왼쪽 그림은 그림같지만, 오른쪽 그림은 왠지 그림같지 않달까. 무척 흥미롭다.

이런 그림은 언뜻 보기에 작가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도, 결국 작가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가방 공개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가방 공개를 해야할 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물건은 다 치워놓은 후에 공개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호호스트라텐 역시 자신이 보이고 싶은 것만을 그린 게 아닐까.


위의 그림 또한 편지 꽂이 그림의 한 종류이다. 왼쪽 그림은 편지꽂이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해 빠져나간 리본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왠지 뒷면이 있을 것만 같은, 그래서 뒤집어 보고 싶게 만드는 그림이다. 오른쪽의 그림은 트롱프뢰유의 제왕이라 불렸던 헤이스브레흐츠의 그림인데, 단순히 편지 꽂이 그림이라고 보기엔 조금 묘한 기분이 든다. 편지 꽂이 중간 부분에 벽감같은 것이 있고 그곳이 움푹 들어간데다 작은 문도 달려있다. 또한 해골까지 놓여 있다. 이는 인간이 갈구하는 물질적 욕망과 호화로움과 쾌락이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언젠가는 결국 쇠락하고 소멸한다는 '바니타스' 주제를 의미한다. 이는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런 편지 꽂이 트롱프뢰유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재미있는 변화를 보인다. 그것은 편지꽂이 같은 장치가 소멸된다는 것과 사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틀(프레임)이 없어지고, 사진같은 그림대신 사진을 그린 그림이 등장한달까. 왠지 미국의 실리주의를 그림에서도 발견하는 것 같아 무척 재미있다.


편지 꽂이 그림은 무언가를 세워두었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라면 이번에 볼 그림은 수평의 트롱프뢰유이다. 왼쪽은 전체가 그림이 아니라 테이블 위의 상감이 그림이다. 테이블에 앉아 사무를 볼 때, 실제로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테이블이지만 무엇인가 놓여있다는 느낌을 준다. 무척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같으면 정신 사나워서 저렇게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란 느낌도 들지만.

오른쪽 그림은 수평의 트롱프뢰유에 깨진 유리 효과를 덧입힌 것이다. 뒤에 있는 건 그림이 확실한데, 앞의 유리가 실제인지 아닌지 무척 헷갈린다. 바로 이것이 깨진 유리 그림이 주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재미있게도 스페인 - 프랑스 평화 조약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평화조약 전에 그려진 그림이었으니까.

그림위의 유리는 더욱 발전해 판화를 가장한 유화, 판화를 가장한 유화위의 깨진 유리로도 발전한다. 깔끔한 판화처럼 보이는데, 프레임부분까지 그림으로 처리한 그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느낌까지 든달까. (笑)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그림 위의 그림>이란 것이다. 그림 위의 그림은 그림 위에 그려진 파리로 시작한다. 독일에서는 초상화에 파리가 붙은 그림이 많았는데, 이 형식이 이탈리아로 넘어오면서 종교화에까지 적용된다. 위에 보이는 그림 역시 종교화의 일종으로 왼쪽 그림은 하단부분에 오른쪽 그림은 예수의 가슴 부근에 파리가 붙어 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설마 화가들이 성모자나 예수의 그림에 파리를 그렸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당황했을 모습이 그려진다. 파리를 쫓기 위해 손을 휘휘 내젓는 관객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이 다음으로 소개되는 것은 <그림위의 쪽지>인 카르텔리노와 관련한 것들이다. 이는 그림의 안팎을 교란하기 위해 그려진 장치로 뒤에 그려진 그림은 그림인데, 앞에 있는 것은 그림인가 진짜 쪽지인가를 관객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왠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을 떠올랐달까.

그외에도 찢겨진 캔버스 그림도 무척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찢겨진 캔버스 그림은 일본 작가의 작품으로 일본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 밑에서 개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이다. 신화라 함은 신성한 것인데, 개가 캔버스를 찢고 고개를 내민 것에서 웃음이 터져버린다. 물론 이 그림이 실재처럼 보일리는 없지만, 개가 머리를 내민 것으로 조금은 다른 유쾌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달까.


위 그림은 앞에도 소개된 헤이스브레흐츠의 그림으로 다양한 트롱프뢰유 기법을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벽에 걸린 그림은 벽감안에 있는 해골과 구겨진 종이를 묘사하고 있다. 해골은 바니타스를 의미하고, 밑에 있는 쪽지는 카르텔리노라고 봐야 할까. 해골이 들어 있는 것은 벽감이다. 만약 이 그림의 배경이 없다면 또한 캔버스에서 종이가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면 왠지 벽감이라고 착각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캔버스에서 그림이 떨어져 나옴으로 인해 캔버스를 포함한 것은 그림이라 여겨지지만, 그외의 것은 실제 벽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이랄까.

캔버스에서 떨어져 나오는 그림은 이처럼 나무틀이 보이는 그림도 있지만, 다른 그림이 보이는 그림도 있다. 또한 캔버스 전체를 감싼 천이 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림도 있다. 캔버스 하나로 다양한 그림을 선보이는 것, 이는 화가들의 상상력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트롱프뢰유 다음 이야기는 <공간의 재해석>이란 주제다. 위 그림을 언뜻 보았을 때 실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감이 살아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앞에 걸린 수건은 선반 뒷면과의 거리감을 보여주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사물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터치, 얕은 공간이지만 공간감을 충분히 살린 표현, 그리고 바니타스를 의미하는 양초까지. 무척이나 흥미로운 그림이다. 이런 선반 그림은 비단 선반 뿐만 아니라, 책장, 장식장, 그리고 앞서 나온 벽감까지 그 범위를 넓힌다.


트롱프뢰유 작가들의 공간 지배 능력은 집안의 작은 장소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프레스코화(벽화)의 경우 공간을 극대화하고 실재화하는 수완을 톡톡히 발휘한다. 이는 원근법을 이용해 공간의 환영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천장화에서 더욱더 큰 능력을 발휘한다. 성당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 봤을 때 저런 그림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정말 성당의 천장이 다른 세계까지 연결되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건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트롱프뢰유는 콰트라투라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트롱프뢰유 수법은 <화면의 경계 무너뜨리기>이다. 이런 기법으로는 볼록 거울을 사용한 듯한 그림, 초상화의 손이 프레임에 걸쳐 있는 그림들이 먼저 소개된다. 위에 나온 왼쪽 그림은 가부키 공연중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모습으로 밑을 자세히 보면 화면 테두리에 걸쳐 앉은 사람과 화면 밖으로 나오려는 사람이 보인다. 프레임 밖으로 나와서 어쩌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랄까. 오른쪽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그림이라면 절대 없어야할 그림 속 인물의 그림자가 보인다. 근데 손의 그림자가 저렇게 비치나? 그림 속의 손의 손가락은 오무리고 있는데 그림자 속의 손은 손가락을 펼치고 있으니...


위 그림은 테두리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테두리를 들고 걷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재미있는 것은 오른쪽에 있다. 테두리를 들고 걷는 사람의 뒤에 보이는 그림속 인물이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테두리안에 있는 건 똑같지만, 누구는 나가서 걸어다니고 누구는 그속에 갇혀 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테두리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이나 튀어나오려는 사람을 보면 왠지 티비 밖으로 나오려는 혹은 나오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링의 사다코를 생각나게 한달까. 윽. 갑자기 소름이...(汗)


이번에 만나볼 트롱프뢰유 작품들은 <입체감을 갖는 그림>이다. 위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이거 조각아니야? 라고 생각했다면 작가의 의도가 훌륭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나 역시 이건 벽 선반에 조각을 올려 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프레임도 조각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그림이다. 이 작품은 1435년경의 작품인데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이런 조각처럼 보이는 작품은 조각인 양하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조각을 대신한 그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조각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만, 조각처럼 보이는 그림은 조각을 대신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일지도. 옛날 사람들도 효율성을 추구했다는 생각을 많이 들게 한 그림이 이런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보고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진다면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배경에 비해 사람이 흐릿해 보이기 때문이다. 문이나 벽은 실제처럼 보이는데, 사람은 왠지 붕 뜬 느낌이랄까. 이는 트롱프뢰유 수법중 샹투르네(컷 아웃)이란 것이다. 이 그림의 경우 여성을 그린 나무판을 잘라 그림에 붙였다고 한다. 이렇듯 배경에 그림을 붙이는 것, 이것을 샹투르네라고 하는데, 이런 그림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만든다. 밤에는 절대 보고 싶지 않달까.


마지막으로 살펴 볼 트롱프뢰유 작품은 <커튼을 이용한 눈속임> 작품들이다. 위의 그림은 꽃을 잘 그리는 작가와 직물을 잘 그리는 작가의 합작품이다. 커튼이 진짜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꽃이 그림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반대로 꽃이 그림이란 것을 강조함으로써 커튼이 진짜가 아닐까 하게 만드는 그림이기도 한다. 만약 이 그림이 내 눈앞에 있다면 커튼을 완전히 열어젖히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커튼이란 것은 가리는 수단이다. 그러하기에 커튼이 쳐져 있는 뒷부분에 뭔가가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실제로는 아무리해도 뒤를 볼 수 없는 커튼인데도 말이다.

이런 커튼은 뒤에 다른 그림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비밀을 엿보게 하는 느낌도 갖게 만든다. 또한 커튼은 훌륭한 무대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커튼이 있음으로 해서 더욱 웅장해 보이고, 더욱 성스러운 느낌도 준달까. (종교화의 경우)


위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다. 이젤의 다리가 보인다. 그런데 보이는 건 풍경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뒤로 보이는 풍경 사이에 캔버스의 모습과 캔버스에 종이를 고정해 놓은 클립도 보인다. 이렇다 보니 어디가 그림이고 어디가 실제인지 헷갈린다. 게다가 커튼까지 쳐져 있으니 커튼을 젖히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이 그림이 실제와 그림의 교란이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그림은 그런 목적면에서 아주 성공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트롱프뢰유 그림들을 보면서 내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상을 빼꼼히 들여다 본 기분이다. 책에 실린 도판이라 눈 앞으로 확 다가오는 느낌은 없지만,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를 상상해 본다. 오래전에 그려진 그림이라 사실적인 면이 떨어지는 그림이라도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을 충분히 속이고 놀래켰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림은 딱딱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관객과 화가가 즐겁게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을 벌이기도 하는 이런 작품들이 있으니까. 어떤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인지, 좋은 그림인지 나는 딱잘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고 즐거워진다면 좋은 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 봐도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는 그림을 보는 것보다는 깜짝 놀라게 하거나 미소를 머금게 하거나 때로는 큰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그림이 잘 그려진 좋은 그림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에.

사진 출처 : 책 본문 中 (18~19p, 50~51p, 66+69p, 71~73p, 82~83p, 98~99p, 114~115p, 126~127p, 136~137p, 152~153p, 158p, 175p, 182~183p, 194p, 208~2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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