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소녀
로버트 F. 영 지음, 조현진 옮김 / 리잼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SF장르라고 하면 난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토탈리콜, 우주전쟁 같은 것들이, 책은 필립 K. 딕의 유빅이나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유령 여단,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같은 음울한 분위기의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과학 기술이 인류에게 가져온 혜택보다는 그로 인한 파괴와 멸망으로 가는 암울함이 내가 떠올리는 SF장르란 것이다. 물론 아직은 SF라는 장르에 대해 내공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1人인지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생각만을 가지고 있던 내가 『민들레 소녀』를 읽었을 때 깜짝 놀라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총 15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은 SF장르이면서도 SF같지 않고, 따스하면서도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경이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나 안드로이드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성이 짙은 작품들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을 해주게 만들었다.

표제작인 <민들레 소녀>는 먼 미래에서 온 소녀와 만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실 소녀라기 보다는 아가씨란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이 남자가 처음엔 소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240년 후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는 게 쉬 믿길 일은 아니잖는가. 소녀를 만나면서 첫사랑의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느끼면서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 사랑은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었다. 사랑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소녀가 했던 말인 "그제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을" 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올 만큼 행복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아, 넌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21세기 중고차 매장에서>는 물질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자신의 본 모습으로는 부끄러워 차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 차를 입는다는 것은 옷으로 자신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듯 차를 이용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의미한다. 원래의 본모습으로는 더이상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그에 비해 나체주의자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앞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차란 것은 겉모습일 뿐이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본연의 모습보다 겉모습에 더욱 치중해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프라이팬 조종사>는 읽으면서 쿡쿡하고 자꾸만 웃게 된 작품이다. 모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한 일종의 쇼였지만, 그 마음이 기특하고 갸륵하다. 이런 남자라면 나도 넘어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팝콘 튀기는 TV>는 손해 보는 장사는 없다는 교훈을 강하게 남긴 작품이었고, <별들이 부른다>는 지금 사는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한 남자와 화성에서 온 새인 키츠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둘 다 지금 있는 곳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이들은 여행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는 안드로이드로 만들어진 모형시인들이 전시된 박물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와 같은 문학은 과거의 전유물로 취급되고 시인들이 있던 자리는 클래식 차들로 채워진다. 이것에 분노를 느낀 큐레이터가 내린 조치는? 눈앞에서 그 광경이 그려지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지는 기분이다. <당신의 영혼이 머물 자리>는 안드로이드 이야기이다.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수 없는 안드로이드에게 프로그래밍한 것때문에 결국 파탄을 맞게 되는 남자. 어찌보면 우리는 안드로이드같은 인간이 만들 피조물에 대해 너무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거와 미래의 술>은 읽으면서 무척이나 공감하게 된 작품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처구니 없이 큰 실수를 저질러 자신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의 실수로 미래를 바꿔버리게 된 것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또다시 똑같은 실수를 거듭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의외로 자신을 잘 바꾸지 못하니까.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남자와 대비되는 인물은 방랑자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그리고 그가 수없이 되풀이한 잘못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것을 보았을 때... 만약 그때 그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른 길을 걸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테니, 그는 어쩌면 영원한 방랑자로 남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외의 작품들 모두 흥미로웠다. 지구 멸망이후 화성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파란 모래의 지구>는 화성인들의 삶이나 지구인들의 삶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늘에 새겨진 글자>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 보이는 것때문에 외계인과 지구인들 사이에 생긴 오해를 이야기한다. 마지막에 푸흡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달까. 뒤로 갈수록 깜짝 반전들이 튀어나와 무척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호시 신이치의 작품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촌철살인의 마지막 한 문장같은 것) 물론 로버트 F. 영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처럼 작품 내용이 섬뜩하고 무섭고 반전이 헉소리가 나올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반전은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이 현실성을 띠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은 현대 문학과 문학을 창출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을 사랑한 큐레이터>라든가 <화강암의 여인>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더이상 예전의 신비로운 것들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등장시켜야 했던 것이 우주선과 외계인일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프라이팬 조종사>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엇을 잊고 살아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거론하면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애니메이션 클라나드이다. 난 이 작품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애니메이션 중에『민들레 소녀』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 헌데, 난 다른 소설에서 이 작품의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자키 시리즈 중 헌책방을 소재로 한 작품 속에서 헌책방 주인인 베니코 여사가 읽고 있는 것이 바로『민들레 아가씨』란 책이다. 일본에서는 슈에이사(집영사)에서 1980년에 나온 책으로 『たんぽぽ娘 海外ロマンチック SF 傑作選 2』(민들레 아가씨 해외 로맨틱 SF걸작선 2)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이 たんぽぽ娘이 바로 로버트 F. 영의 작품 민들레 소녀이다. 가끔 책을 읽다가 이런 것을 발견하면 무척이나 재미있달까. 뭐, 그렇단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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