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때 덕혜옹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어떤 것을 통해서였는지는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사진에 대해서는 약간 기억이 난다. 호호 백발 할머니의 모습에 약간은 초라한 행색이었달까. 난 공주는 알겠는데, 옹주는 도대체 뭐야, 라고 엄마에게 물었다. 옹주는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을 의미한다. 양반의 아들로 따지면 서자쯤 되는 호칭이다. 철없던 나는 그래도 황족의 마지막 후예란 말에 의미없는 두근거림을 가지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서 덕혜옹주의 삶은 내가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의 가족과 살아남은 공주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꽤 유명세를 탔지만, 덕혜옹주는 아시아의 작디작은 나라의 마지막 옹주라서 그랬는지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늘 쓸쓸함과 아쉬움을 함께 가져온다. 덕혜옹주역시 마지막 황녀가 아니라 왕이 실세로 군림하던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렇게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그렇게 태어난 그녀의 미래는 이미 모두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랄까.

책 본문은 총 네파트로 나뉘어 스토리가 진행된다. 첫번째 파트는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로 고종황제가 살아 있을 당시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파트는 일본에 건너가 볼모로 살게 된 시절, 세번째 파트는 덕혜옹주의 결혼과 출산 등 가정을 일본인 남편과 가정을 꾸리고 살게 된 이야기, 마지막 파트는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 가던 때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했던 덕혜옹주는 일본의 식민 지배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터무니없이 높고 단단한 벽이었을 것이다. 조정대신 중에도 믿을 사람은 없다. 오히려 고관대작들이 일본의 편에 붙어 왕실을 압박하고 유린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영친왕 역시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해야 했고, 의친왕은 상해에 잡혀 있었다. 덕혜옹주 마찬가지로 일본에 거의 끌려가다시피해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조센징으로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 학교 생활을 해나갔다. 또한 원치 않는 일본인 남자, 그것도 대마도 번주의 양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다행이라면 남편이 차갑고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단 것이랄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 덕혜옹주는 너무나도 꼿꼿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배려에 마음을 조금 열긴 하지만, 자신이 조선인이란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아이를 가졌을 때,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혈이 될 아이를 생각하면 눈 앞이 깜깜했으리라. 그렇게 태어난 정혜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조선인이란 것을 알게 된다. 덕혜옹주는 자신의 딸 정혜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끊임없이 각인시켰지만, 그것이 정혜에게 큰 압박이 되고 말았다. 남편과의 사이도 딸과의 사이도 틀어져가는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우울증을 앓게 된다. 

만약 덕혜옹주가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더라면 편하게 살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자신의 조국이 무너져가는 걸 고스란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걸 생각하면 그녀는 결코 일본에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일본인과 한국인의 결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당시는 지금과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오히려 덕혜옹주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더라면 그게 더 이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덕혜옹주는 목련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추운 겨울 꽃봉우리를 맺은 상태로 봄을 기다려 하얀 꽃을 피우지만 금세 시들고 변색되어 종국엔 그 아름다움마저 잊힌채 버림받게 되는...

『덕혜옹주』는 덕혜옹주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일제 시대의 시대상은 간간히 언급될 뿐 대부분은 덕혜옹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책이다. 그런 이유로 내용이 좀 심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단 느낌이랄까. 물론 역사 소설이라고 해서 100% 논픽션이 될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덕혜옹주가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큰 틀정도로만 자료가 있지 아주 자세한 것은 없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다분히 포함된 것이 역사소설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 장면이 100% 픽션이란 것도, 그렇게 결론을 내버리는 것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룡점정에서 정확히 찍혀야 할 점이 너무 크게 찍혀 순정만화에 나오는 용이 되어버린 형국이랄까.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버려졌던 덕혜옹주의 삶을 재조망하고 현실로 불러내려 했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마지막을 픽션으로 처리함으로 인해 진실성이 많이 훼손된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드라마로 끝나버린 느낌이랄까. 오히려 그후에 덕혜옹주가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독자는 참혹하고 아픈 진실이라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