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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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티비 프로그램 중에서 인생극장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확 달라지는 이야기였는데, 코미디 프로그램이었음도 불구하고 묘하게 진실처럼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네스 펠트로가 나온 영화 중에 도어스란 영화가 있는데, 전철을 타느냐 못타느냐로 그녀의 앞으로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앞에 나온 인생극장은 스스로가 결심하고 자의에 의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면, 도어스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 즉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보자면 책의 제목에 나오는 못 가본 길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환경같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안갔다와 못갔다는 비슷하게 들려도 그 속내는 아주 극과 극이라 생각한다. 안간 것은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고, 못간 것은 나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서른 몇 해의 시간을 살아 오면서 스스로 결정해 안가본 길도 많지만,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갈 수 없었던, 그래서 못 갔던 길도 많은 듯 하다. 원래 인생이란 게 자기 할 대로 하고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 정해서 안가기로 한 길에 대해서도 미련이 생기는데, 못 가본 길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제목만으로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으니, 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런 것일까.

이 책은 작가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 파트와 책에 관한 짤막한 글을 담은 파트, 그리고 이미 떠나버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파트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파트는 작가의 소소하고도 담담한 일상을 적어내려가고 있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전쟁으로 남쪽으로 피난 오던 시절의 힘겨웠던 이야기며, 대학에 입학했는데 바로 얼마 후에 전쟁이 터져 학교에 가지도 못한 이야기며... 떠올리면 가슴아프고 쓰라릴 기억이지만 담담하게 풀어 놓는 이야기 한 구절, 한 구절이 오히려 더 가슴 깊이 스며들어 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가슴 아픈 기억에 대한 이야기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최신 영화를 보러 갔다가 떠오른 고교 시절의 추억이며, 축구란 것에는 관심도 없다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팬이 된 이야기를 읽어 내려 갈 때는 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리기도 했다. 또한 손수 집 마당을 가꾸는 이야기를 보면서, 지인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던 이야기를 보면 여전히 세상은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가득하고, 그래서 즐겁다, 라는 감정이 전해져 온다. 

나는 어떨까. 작가의 반도 안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삶에, 사람에 염증을 내고 넌더리를 낸 적이 수도 없이 많지 않았던가. 따져 보면 하루하루가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대충대충 보내고 있지는 아니한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80순의 나이에도 붓을 꺾지 않고 열심히 집필 활동을 하는 작가의 뒤에는 이런 활기참과 세상에 대한 고마움, 사랑스러움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두번째 파트의 책 이야기는 정확히 따지면 서평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느낌들, 그리고 그 느낌들이 가져다 주는 추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나 역시 오래전에 읽은 책을 꺼내들 때, 혹은 새 책이지만 문득 내가 겪어 왔던 일과 비슷한 일이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난 책을 읽으면서 좀 분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는 나도 이렇듯 편하게 책을 읽으면서 책이 보여주는 다른 길을 찾아 산책할 수 있게 될까.

마지막 파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박수근 화백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1951년 겨울, 미군 PX에서 일하던 작가는 영화관 간판을 그리던 박수근 화백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의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거리낌없이 보여주다니, 깜짝 놀라게 되었다. 나도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겼던 일을 작가의 연세쯤 되면 그렇게 다 드러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난 절대로, 죽을 때까지의 비밀로 그것을 안고 가게 될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운 행동을 스스로 남에게 드러내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는 작가의 연륜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이다. 마치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 어릴 적에는 말야~~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랄까. 또한 요즘 할머니는 말야~~ 이렇게 이렇게 지내고 있어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랄까.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젊은 작가들이 써내려간 일상의 이야기와는 확실히 다른 푸근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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