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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 서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박영난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헌책방이라고 하면 아련한 그리움이 먼저 떠오른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내가 사는 곳에도 헌책방이 몇군데 있었다. 하지만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더니 이젠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조금 큰 도시로 나가면 헌책방이 있기도 하겠지만, 인터넷 헌책방도 있고, 중고 서적을 판매하는 사이트도 많아서 그런지 굳이 그곳까지 일부러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건 이제 나도 나이를 꽤 많이 먹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종이 색깔도 바래고,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헌책에는 그 책을 읽어온 사람의 역사가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가진 책들은 대부분 새책이라 나의 역사만이 기재되어 있겠지만, 몇번씩이나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온 책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책 제목이자 총 7편의 단편소설이 연작소설이 되게 만드는 장소인『사치코 서점』. 책 제목만을 두고 봤을 때는 서점에서 벌어지는 혹은 그 서점에 있는 책과 관련된 기묘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읽어보니 서점이나 책과 관련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곳을 들렀던 사람이나 그곳 주인장과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기묘한 이야기였다고 할까. 그렇다 보니 헌책방의 미스터리라고 생각했던 처음의 기대와는 조금 어긋나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분을 맛보기도 했지만, 의외로 따스한 이야기들에 조금씩 내 마음이 누그러져 갔다.
<수국이 필 무렵>은 시타마치의 아카시아 상점가 근처로 이사온 한 커플의 이야기와 그 근처에 있는 라면 가게에서 벌어진 강도 살인 사건 후 그 라면 가게 근처에서 자주 목격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겨진 자와 그들을 지키려는 자, 그리고 짧지만 불꽃같은 사랑을 했던 한 커플의 이야기는 묘하게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에 이끌려서가 아니었을까.
<여름날의 낙서>는 일명 도깨비 낙서라고 하는 것과 관련한 것이다. 일종의 괴담같기도 하고 도시전설같기도 한 이야기인데, 결말부를 보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늘 어른스럽게 게이스케를 지켜주던 형. 그리고 게이스케에게 닥쳐온 위험. 게이스케의 형은 어디로 갔을까.
<사랑의 책갈피>는 헌책방의 낭만을 담고 있달까. 오래된 책사이에 끼워진 서표를 보고 메세지를 남기기 시작한 구니코. 그런데, 정말 그에 대한 답장이 도착했다. 매일매일 그 책을 읽는 남자 대학생을 짝사랑하는 구니코와 책 속에 끼워진 메세지에 담긴 비밀은?
<여자의 마음>은 최고로 섬뜩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편이 휘두른 폭력에 늘 도망을 다니면서도 남편곁을 떠나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였는데, 이 여인에게는 여자의 마음만 있었고, 어머니의 마음은 없었던 것일까. 죽은 남편의 등장과 49일의 비밀.
<빛나는 고양이>는 안타까우면서도 따스함이 가득했던 단편이었다. 어느날 문득 한 만화가 지망생의 방을 찾아온 얼룩고양이 차타로. 차타로는 그곳에 들러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는 길고양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도깨비불처럼 날아든 존재가 그의 삶에 작은 변화를 가져온다. 고양이의 행동을 하는 빛의 정체는 바로... 살아 생전 사랑을 못받았던 작은 생명이 죽은 뒤에나마 따스한 사랑을 받고 떠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사람에게 외면받은채 쓸쓸히 삶을 마감하는 생명들이 너무나도 많다.
<따오기의 징조>는 누군가의 죽음의 징조를 목격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 할머니에게서는 분홍색 꽃다발을, 잘난척 하던 친구에게선 분홍색 머리띠를, 선배에게선 분홍색 머플러를, 집근처에 살던 소녀에게선 분홍색 털모자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어울리는 물건이라 그것이 죽음의 징조인지도 모르고 지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정말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달까.
예를 들어 저승사자라는 게 정말로 있어서 누군가를 노린다고 하면, 그 녀석은 목표물인 인간에게 슬쩍 사인을 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본인은 모르지. 주변의 인간들도 모르고. 내가 본 것처럼 흔한 물건으로 형태를 바꿨기 때문에.
어쩌면 그 인간에게 어울리는 물건으로 보이게 하려고 저승사자도 머리를 짜낸 것인지 모르지. (219p)
마지막 작품인 <마른잎 천사>는 사치코 서점의 주인 할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할아버지가 왜 서점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왜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지, 할아버지의 비밀이 이 마지막 작품에서 밝혀진다.
총 7편의 연작소설에 나오는 마을에는 오래된 절이 하나있다. 그 절이 이 마을을 신비롭게 혹은 오싹하게 만들고 있다. 그건 바로 그 절에 있는 석등이 죽은 자들의 세상과 산 자들의 세상을 연결하는 연결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조금 보기 드문 설정인데, 보통 이승과 저승이 연결되는 부분은 다리나 십자로, 우물, 연못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이런 설정이 꽤 많다)
어쨌거나 두 세계가 연결되는 곳이 가까운 곳이다 보니 신기하고 오싹한 일도 많이 벌어지지만, 대개는 무섭다기 보다는 안타깝고 슬픈 느낌이 강하다. 죽은 뒤에도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 시공을 초월한 연서, 사랑 한 번 받지 못한채 죽어간 한 고양이의 영혼, 사치코 서점의 주인 할아버지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이야기 등은 따스하면서도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책『도시전설 세피아』는 뒷통수를 치는듯한 강렬한 반전과 오싹한 감정이 대부분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었다면, 이 작품『사치코 서점』은 이미 지나가버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을 담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반전이나 오싹함의 묘미는 없지만, 오히려 따스한 느낌의 작품이 가득하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