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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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에는 대학만 가면 난 어른이 될 줄 알았고, 모든 것이 가능할 줄 알았으며, 무조건 행복해질거라 생각했다. 대학에 가서는 난 여전히 할 줄 아는게 없으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할 능력도 안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20대 중반, 나에겐 서른이란 나이가 오지 않을줄 알았다. 스물 아홉과 서른. 딱 한 살 차이인데 그 당시에는 그게 엄청나게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내가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 그리고 서른이 되었을 때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그건 내가 좀 무덤덤한 성격이라서 그럴수도 있었고, 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몇 해가 지나 서른 중반이 된 지금, 난 여전히 혼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또다시 무덤덤해졌다.
 
20대에는 남자 친구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애도 꽤 많이 했다. 오래 사귄 친구는 4년정도 사귀었고, 짧아도 1~2년은 사귀었으니, 남자 친구가 곁에 없는 순간은 별로 없었다. 특히 무슨무슨 날이면 누군가 꼭 필요하단 생각에 전전긍긍했었고, 그런 날은 절대로 혼자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조금 우습다. 지금은 연애를 시작하는 것조차 귀찮다. 첫만남, 어색함의 극복의 수순을 밟아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벌써 질려버린다. 이게 서른 중반의 힘인 것일까? (笑)

서른 한 살의 오은수는 편집대행회사에서 7년을 근무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보통 수준의 여자다. 학력도 외모도 일도. 그래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조용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 재인이 결혼 선언을 한다. 게다가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인 유희마저도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면 직장을 때려치운다. 친구들의 연타에 은수는 깜짝 놀라게 되고, 자신의 삶이 너무 무덤덤하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남자 친구조차 없다. 왠지 갑자기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우연은 재미있게도 여러가지를 대동하고 나타나게 마련이다. 연하의 태오, 선을 본 것을 계기로 만나게 된 영수, 그리고 가끔 미묘한 사이가 되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인 유준. 이렇게 세명이 남자가 거의 동시에 그녀의 사정권안에 들어온 것이다. 태오는 일곱살 연하에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고 있다. 다정다감하고 스위트한 태오의 성격에 은수는 호감을 품고 매력을 느낀다. 결국 미묘한 상황에서 동거까지 하게 되지만, 은수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그와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수는 유기농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CEO로 나이는 좀 연상이지만 믿음직스러운 '어른'이다. 유준은 좋은 친구이지만 어쩌면 친구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은수의 앞에 나타난 세남자. 은수는 태오와 사랑을 키워가고 행복해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미 이십대란 나이를 거친 은수에게 있어 태오는 가끔씩 어린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기엔 적당한 상대이지만, 그이후의 미래는 알 수 없는 사람이랄까. 사회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의 태오는 분명 결혼상대로 적당치 않다. 그런반면 김영수는 평범한 사람이고 말수가 적지만 배려심이 있는 어른이다. 태오와 비교해 보자면 그는 완벽한 어른인 것이다. 태오와 사랑을 할 때는 영수같은 남자가 그저그랬지만, 은수도 현실적인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법. 결국 태오와 갈등 후에 헤어지게 되고, 그후 영수와 결혼을 전제로한 만남을 가진다.

어떻게 보면 차려놓은 밥 상 세개가 한 번에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각각 장단점이 있다. 은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조건과 부합하는지 맞춰보기도 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을 한다. 왜 그렇지 않으랴. 서른이 넘으면 사랑이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는 게 아니란 걸 다 알기 때문이다. 꿈을 좇으며 사는 20대가 활기차고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 시절을 겪은 후에는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태오를 사랑하면서도 결국 선을 긋게 되어 버린 게 그 탓이 아닐까. 그에 비해 김영수는 결혼 상대의 조건으로 꽤 괜찮은 남자다. 하지만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은수의 친구 재인은 조건을 골라 결혼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유희는 사랑에 올인해 이혼남인 동창생과 만남을 갖지만 그 사랑이 두려워지고 만다. 세 여자 모두 사랑과 현실이란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인은 과감하게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유희는 과감하게 사랑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은수는?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모습. 사실 사랑이란 감정이 그렇게 맺고 끊기 쉽다면 사랑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은수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상처받기 싫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게 아닐까.

이 책은 은수의 사랑 이야기 외에도 은수의 부모님 이야기도 함께 그리고 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안의 폭군으로 군림해온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 몰래 아버지 아닌 남자와 오랜 만남을 지속해온 엄마. 하지만 가족들 모두 그 사실을 몰랐다. 딸이라고 해도 엄마와 제대로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한 은수. 아내는 집안 살림이나 잘하면 된다는 은수의 아버지.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다들 바쁘단 핑계를 대면서 모든 것을 엄마에게 미루고, 엄마의 희생을 강요한다. 그게 곪아터져 버린게 엄마의 가출 사건이 아니었을까.

은수의 사랑과 연애, 그리고 이별 이야기도 은수 가족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김영수와 관련한 비밀에서는 헉, 하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달까. 세남자가 거의 동시에 프러포즈해오듯 나타나는 건 분명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성이 강했다. (은수의 직장 문제와 관련한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난데없이 그런 설정이라니? 갑자기 현실은 어디가고 붕 뜬 느낌이었달까. 굳이 그렇게 마무리를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김영수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은수와의 만남을 지속할 필요가 어디 있었지? 은수가 결혼하지고 하는데, 결혼 준비를 할 필요가 어디 있었지? 도대체 이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달까.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드라마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결말은 분명히 이상했다. 평범한 보통의 30대 여성의 사랑과 연애, 이별 이야기에서 갑자기 미스터리로 바뀌다니. (허허참.)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오은수가 꾼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결말이었다.

한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은수는 여러번 사랑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을 한층 더 성숙하게 성장시키기도 하고, 오히려 퇴보시키기도 한다.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할 때는 그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 아량도 넓어지고 마음도 넓어지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 그 사람을 내 손 가까운 곳에 두고 싶어 안달복달하게 되고 그러면 처음의 각오도 점점 옅어진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의 감정이 옅어짐에 따라 단점이 더 눈에 띄는 것이다. 태오와의 사랑은 분명 그랬다. 처음엔 귀엽고 스위트해서 좋았지만 현실과 부딪히니 생각이 달라졌고, 영수와는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어쩌면 영수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은수는 앞으로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여전히 내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채 있는 그대로의 영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은수는 사랑으로 성장도 퇴보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도 말이다. 그래서 이 결말이 찜짐하단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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