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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여인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사랑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 정확히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솔직히 말해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잘 믿지 않는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그려온 이상형과 만났을 때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겉모습만이 이상형인 사람을 두고,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겉과 속을 모두 알면서 더 깊어지든지 얕아지든지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이 시작되는 그 순간을 알아채기란 힘든 일이다. 물론 사랑이 끝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 끝날때는 '어떤' 예감이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콕 집어서 그게 언제라고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사랑이 끝나가는 걸 느껴도 일단은 그것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의 시작과 끝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 순간 불현듯 눈치채게 된다.
구라코시 세쓰코는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명문가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가정교육이 엄했고, 위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세쓰코는 음악이나 옷취향 같은 것은 훌륭했지만, 기지나 위트, 탐구심이나 문학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다른 여자들이 남자들을 보는 취향과 많이 달랐달까.
세쓰코는 남자의 야심이나 일에 대한 정열, 정신적 우월이나 지적 우월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흘러넘칠 듯한 정력을 사업이나 이상적인 현실에 쏟고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들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족속들인가. 볼품없는 풍채의 세계적 학자들이란 또 얼마나 꼴불견인가.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가 멋있어 보인다고들 하지만, 원래 멋있지 않은 남자가 일에 열중한다고 해서 멋있어 보이겠는가. (12p)
세쓰코는 이미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이가 있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지만 세쓰코가 꿈꾸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상으로 연애하는 것을 즐기곤 했다. 공상이라면 아무 죄책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잠든 남편을 보며 혼자만의 공상을 맘껏 즐겼다. 현실이라면 패덕이지만 공상의 세계는 모든 것이 미덕이었기에.
너무 깊게 분석하지 않는 세쓰코의 사고 속에서 그녀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소중히 해온 부덕(婦德)은 사실 상당히 모호하게 정의되었던 것이다. 공상의 영역은 아직 미덕에 속했고 현실은 패덕에 속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쓰코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좀 더 준엄해야 했다. 바로 그 때문에 공상속에서 그녀는 매우 관대했던 것이다.
아무리 사악한 마음도 마음속에 머무르는 한 미덕의 영역에 속한다고 세쓰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의 행위는 아무리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순진한 형태를 취한다고 해도 패덕의 세계에 속했다. (61p)
이런 세쓰코가 현실의 남자인 쓰치야와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공상을 벗어난 현실에서 말이다. 세쓰코는 육체적인 관계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면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유부녀인 세쓰코가 남편이 아닌 남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그자체로 비도덕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아무리 사랑이 고결하고 순수한 감정이라 해도, 남편을 속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쓰코는 이런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쓰치야와의 연애를 아주 즐겼다고 할까.
그녀는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뭔가 시적인 것을 필요로 했다. 시 가운데서도 가장 에로틱한 시. 관념 중에서도 가장 육감적인 것. 남자들처럼 관념이 육감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육감이 바로 관념화하여 육체의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하는 것…… (31p)
세쓰코를 보면서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점은 공상속의 연애를 하는 것처럼 현실속의 연애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뭔가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꿈꾸는 여자랄까. 그래서 그런지 하나하나의 행동을 계산에 넣고 행동한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보이겠지, 쓰치야가 이렇게 나오면 난 이렇게 행동할 거야, 라는 등의 이미 짜놓은 각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 꼭 공상처럼 되란 법은 없다. 세쓰코는 위험하게도 밀회를 거듭하는 동안 자신이 쓰치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아주 미묘한 것에 일일이 감동해서 쓸데없이 마음의 진폭을 늘려서는 안되었다. (126p)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쓰치야가 누구를 만나든 질투따위는 하지 않았다. 때로는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위험한 순간에도 그녀는 그 나름의 의미를 붙이고 짜릿함을 얻는다. 특히나 쓰치야와 함께 간 여행에서 백부가 호텔에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후의 세쓰코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다. 처음에는 덜덜 떨다가도 나중에는 그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니까.
내 고통은 어쩌면 나 혼자만의 것이었던 게 아닐까. 모든 게 나 한 사람한테 일어난 사건이었던 게 아닐까…… (191p)
그러나 이런 관계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쓰치야와 밀회를 하는 동안 세쓰코는 총 세번의 임신중절 수술을 받게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쓰치야가 조금씩 변해간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마지막을 준비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연극이었는데, 쓰치야가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세쓰코는 쓰치야와 결심한 후 죽을 결심도 해보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쓸 생각도 해보지만 결국 그 편지를 부치지 않고 찢어버린다. 난 이런 세쓰코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다. 이로써 세쓰코는 쓰치야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해버렸을 테니까. 그리고 비틀거리고 흔들렸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들어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난 세쓰코라는 여성이 참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했지만, 점점 세스코의 밀회를, 세쓰코의 변화를 즐기게 되었다. 세쓰코의 연극적인 말투와 연애 방식, 어쩌면 우리들 역시 연애를 할 때는 일종의 연극을 하는 지도 모른다. 즉, 아무 생각없이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상대의 행동을 예측해보기도 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또다른 대응을 하기도 한다. 세쓰코는 아주 솔직한 여성이었기에 그런 면이 두드러져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맹목적인 사랑은 세쓰코에게 맞지 않았다.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세쓰코는 쓰치야와의 결별에서 아픔을 느꼈지만, 그것이 세쓰코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그렇게 보면 세쓰코는 아주 현명하게 사랑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미시마 유키오란 이름을 보면『금각사』와 같은 소설이 먼저 떠오르고, 그다음에는 할복자살을 했다는 것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딱딱하고 재미없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섬세한 심리묘사에 놀랐고, 뻔한 이야기를 색다르게 만드는 그만의 방식에, 그리고 가슴 시원한 결말부에 매료되었다. 남성작가이면서 여성의 심리를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내다니, 정말 놀라웠달까. 남자와 여자를 서로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나 연애나 사랑을 할 때 더 그렇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여성의 심리를 이토록 잘 집어 내다니. 미시오 유키오 역시 이 책의 주인공 세쓰코처럼 유한계급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잘 묘사해낸다는 것에는 그다지 놀라움을 느끼지 못해도, 여성의 심리묘사는 분명히 그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미시마 유키오란 작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의 일생, 그의 마지막과 관련한 편견을 걷어내고 그의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