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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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으로는 그 내용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온다 리쿠의 책들이 바로 그러하다. 왠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책 제목들은 판타지 소설이나 환상 소설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밑도 끝도 없는 미궁을 보는 듯하다. 이번에 나온 여름의 마지막 장미 역시 이 제목 자체로는 그 어떤 상상도 불허한다. 일단 제목에서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장미의 서글픔, 안쓰러움, 쓸쓸함과 마지막이기에 아름다운, 그런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떨까. 

매년 가을 산중의 호텔에서는 재벌가인 사와타리家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열린다. 주최자는 이치코, 니카코, 미즈코란 이름을 가진 세 자매. 이들은 손님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하다. 그게 이야기의 특징이다. 또한 사와타리家 세자매의 이야기 방식 역시 무척이나 독특하다. 마치 세사람이 만담을 하듯 서로 주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올해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건 왜일까. 참석자들은 그런 위화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한다. 그런 와중에 변사사건이 발생한다.

이 책의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프롤로그 부분인 주제, 그리고 나머지인 제 1변주에서 제 6변주까지 화자가 바뀌어가면서 스토리가 진행된다. 제 1변주를 읽을 때만 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하지만 제 2변주부터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은 화자가 바뀌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묘하게 뭔가가 어긋난 느낌이랄까. 그것은 제 3변주에 들어가면서 확실성을 띄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제 6변주에 이르러 폭발하듯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참석자들은 서로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이기도 하고,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와타리家와 관련한 비밀이면서 동시에 각 화자들과 관련한 비밀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지만, 결국 압력을 이기기 못하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것이랄까.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탄이 터지듯이 그렇게 터져나오는 진실은 때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것이며, 바닥을 알수 없는 어둠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비밀이란 것은 감추려 하면 감출수록 드러내보이고 싶기도 한 속성을 가진다. 그 비밀과 진실은 허구로 가장된 이야기 속에 감춰져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 왔다. 그러던 것이 한 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은 온다 리쿠가 자주 쓰는 '기억'이란 것과 맞물려 있다. 사실 인간의 기억이란 것은 무조건 사실이나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도 각각의 화자가 기억하는 것은 때로는 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각색되고 윤색된 기억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혹은 날조된.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기억은 근사하게 치장하고 싶어하고, 좋지 않은 기억은 머릿속 깊은 곳에 봉인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하기에 각각의 화자가 기억하는 것들의 속성은 애매모호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이들이 기억하는 것 중에 진짜 일어났던 일들은 무엇이고,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산속에 위치한 호텔의 음울함을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해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곳은 일종의 클로즈드 서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밀폐된 공간도 아니요, 누군가 그들을 속박하고 가두는 곳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그곳을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그 공간이 악의에 가득찬 곳이라고 하면서도, 세자매가 가진 악의를 꿰뚫어보면서도 자신이 가진 악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자들. 누가 더 악한 자들일까. 제 6변주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의 스토리는 알랭 로브그리예가 쓴『지난해 마리앙드바드에서 ㅣ 불멸의 여인』이라는 책의 본문을 중간중간 삽입해 진행된다. 이 삽입구들은 책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어떨어져 기억의 애매모호함이나 환상적인 속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또한 이 내용 역시 조작된 혹은 날조된 기억과 관련한 내용이기에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기본으로 깔고 있지만, 날조된 기억과 기억의 애매모호함이라는 환상성이 가미된 소설이 탄생했다. 일본에서는 2004년에 초판 발행된 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가 우리나라에서 인기 작가에 꼽히는 작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금 의외인 부분이다. 아마도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부적절한 관계, 부적절한 마음,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애증의 소산인 악의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에 조금은 충격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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